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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당시 중학생이던 내 아들은 주말마다 독거노인을 방문해 음식을 대접하고 말동무 노릇을 해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뭔가 의미 있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 왔다. “혼자 사는 할머니들이 우리랑 얘기하는 걸 무척 좋아해. 평소 너무 외로워서 그렇겠지? 그런데 소년소녀 가장이나 고아들도 많잖아. 고아들이랑 노인들이랑 함께 살게 하면 서로 의지도 되고 외롭지 않아서 좋을 텐데.” 그런 시도가 있다는 보도를 어느 방송에선가 본 기억이 있었기에, “그렇지 않아도 이미 하고 있을 걸”이라고 대답해주었다.

그 얼마 뒤, 수십년간 사회사업에 헌신한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나름 화제감이 될 만하다고 생각해 꺼낸 것이 아들과 대화한 내용이었다. “고아원과 양로원을 통합 운영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성과가 어떤가요?” 그분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거 애초에 안되는 일이었어요. 노인들은 아이들 때리고 간식 뺏어 먹고, 아이들은 그런 노인들에게 쌍욕 하고…. 자애로운 노인과 천사 같은 아이들은 상상 속에만 있는 거예요.”

기대에 정면으로 배치된 대답에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노인들이 아이들 간식을 뺏어 먹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줘도 그런 일이 생겼겠느냐고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그런 세상을 바라는 것이 ‘자애로운 노인과 천사 같은 아이들’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본성이 정말 그런 것일까?

사람의 성정이 전적으로 유전자에 좌우되는지, 아니면 자신을 둘러싼 ‘상황들’에 반응하고 적응하면서 형성·변화하는 것인지 쉽게 결론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설령 그악스러운 심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인간이 있다 하더라도, 많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스페인의 역사철학자 호세 오르테가이가세트는 “인간에게 본성이란 없다. 그에게는 오직 역사가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이 말대로, 그 노인들을 그렇게 만든 건 그들이 겪은 역사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 코가 석자인데 남 사정 봐줄 여유가 어디 있나”는 한국 현대사가 사람들에게 가르쳐 온 보편적 신념의 하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교육재정확대를 위한 국민운동본부, 친환경무상급식 풀뿌리국민연대, 보육재정파탄대응 공동대책위 회원들이 17일 국회 앞에서 공무원연금 개악 및 무상보육, 무상급식 후퇴에 반대해 농성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홍준표 경남지사가 초·중·고생에 대한 무상급식 예산지원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뒤, 무상급식을 ‘과잉복지’나 ‘부당한 복지’의 대표 사례로 지목해 공격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지난 정부가 4대강 사업이니 자원외교니 하는 터무니없는 일들에 수십조원씩을 쏟아부을 때에는 잘한다고 박수치던 사람들이, 고작 학생들 점심 한 끼 값 때문에 나라가 망할 지경이라고 호들갑 떠는 모습은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지만, 그래도 그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부잣집 아이들 ‘공짜 밥’ 주는 데 돈 들이는 건 예산 낭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상급식의 원 취지는 부잣집 아이들에게 ‘공짜 밥’ 주자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눈칫밥’ 주지 말자는 것이었다. 가난한 부모 둔 죄로 눈칫밥 먹으며 자라야 하는 아이들, 그런 현실을 함께 겪으며 밥과 자존심을 교환하는 게 세상의 원칙이라는 믿음을 내면화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주역이 되는 미래는 어떨 것인가?

어린이가 나라의 미래라면 노인은 나라의 역사다. 밥 한 끼를 위해서 자존심은 물론 양심까지 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로 취급했던 것이 우리의 현대사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 못하면, 미래의 인간형도 지금과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4대강 강바닥에 돈을 쏟아부어 환경을 오염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보다는, 이 나라의 미래인 아이들의 심성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가난한 집 자식들은 ‘눈칫밥’ 얻어먹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고집한다면, 미래에 화를 입는 것은 지금의 어른들일 것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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