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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기고 싶습니다.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 싸워보니 우리가 현대차라는 회사 하나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가를 상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현대차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절박한 목소리가 폐부를 찌른다. 대법원이 불법파견이라 판결하자 “그럼 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며 현대차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말도 안되는 소송이라 기각함이 당연한데도 헌법재판소는 4년째 판결을 미루고 있다. 비슷한 취지의 기간제법 헌법소원은 이미 1년 전에 기각한 헌재는, 유독 현대차가 제기한 소송만 ‘쥐고 있다’. 불법파견은 범죄행위가 분명하니 정몽구 회장 등 회사 임원을 처벌하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대검이 직접 회의까지 주재하며 작년 연말까지 결론을 내겠다고 해놓고, 4년이 지난 오늘까지 기소조차 안 하고 있다. 1000명 넘는 비정규직을 불법파견이라 선언한 판결문이 나왔는데도, 검찰은 처벌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조차 하지 않는다.

현대차 아산공장 비정규직이 제기한 소송은 1심에 이어 4년 전에 2심도 승소했지만, 대법원은 아직까지 판결을 미루고 있다. 쌍용차 사건은 2심 판결 후 단 9개월 만에 결론을 뒤집은 대법원이 말이다. 검찰, 대법원, 헌법재판소 등 거대 국가기구가 유독 현대차 사안만 4년 넘게 시간을 끌어주고 있으니, “국가를 상대하는 것 같다”는 얘기가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러는 동안 현대차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삶은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특히 현대차 자본이 제기한 수백억원대의 손해배상소송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며 조합원들을 옥죈다. 게다가 이 소송은 파업에 대한 손해를 받아낼 목적이 아니라 노조 파괴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지회 소속 회원들이 30일 현대차 신차 발표회가 열린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불법파견 시정 및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현대차가 300여명의 비정규직 조합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에 대해, 지난 10월23일 울산지방법원이 70억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대차는 판결 선고 이전에 68명, 선고 직후에 51명에 대해 소송을 취하한다. 이유가 뭘까? 소송이 취하된 총 119명 중 118명이 노조 탈퇴자들이며 이들 중 97명은 현대차를 상대로 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도 취하한 이들이다. 유일한 조합원 1명은 애초부터 현대차 상대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경우였다. 즉 현대차는 손해배상 취하를 미끼로 노조 탈퇴와 현대차 상대 소송을 포기하도록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손해를 받아낼 목적이 아니라 권리 행사를 방해하려는 소송을 미국에서는 ‘전략적 봉쇄 소송’이라 하여 각 주별로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한국의 민사소송법 전문가들 상당수도 이런 종류의 소송에 대해서는 법원이 ‘소권 남용’으로 보아 기각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현대차에 책임을 묻는 소송은 4년째 지연되지만, 현대차가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은 법원이 청구액을 거의 100% 인정하고 있다. 억울하게도 판결에 항소하려면 인지대만 수천만~수억원을 내야 한다. 돈 없으면 정당하게 재판받을 헌법상 권리도 무시된단 말인가.

급기야 지난 6일, 손해배상 대상이 된 비정규직 조합원 1명이 자살을 기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천만다행으로 생명엔 지장이 없지만, 그가 쓴 유서에는 “현대에게 꼭 이기세요” “현대는 다 개○○다”라는 분노가 절절히 녹아 있다. 가족들에겐 져주는 걸 한없이 행복해하던 이들이 현대차를 상대로 단 한번이라도 이기고 싶은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지난 10년 동안 상대한 건 ‘한국의 비정규직 제도’이기 때문이다. 현대차 비정규직의 승리가 저 노예제도를 허물어뜨리는 교두보인 것이다. 이제 손해배상소송 1심에 이어 줄줄이 2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노조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소송은 기각함이 마땅하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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