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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말기였던 어린 시절에 ‘근대화 슈퍼’라는 간판을 단 상점을 동네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당시 ‘근대화’는 ‘새마을’이라는 구호와도 짝을 이루는 국민적 과제로 제시되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래’를 거의 매일 방송과 야외 스피커를 통해 듣던 시절이었다. 이 노래의 2절은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로 시작하는데, 그렇게 초가집을 허문 자리에 콘크리트 양옥의 ‘근대화 슈퍼’가 들어섰던 셈이다.
서양 클래식 음악, 특히 서양 오케스트라는 ‘근대화’에 대한 시청각적 모델을 구체화하여 제시했다. 그것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제시하는 미래의 청사진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한목소리로 전진해 가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클래식 음악과 서양 관현악을 실제로 즐기느냐는 둘째 문제다. ‘근대화’에 대한 선망을 가진 이들에게 그것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이상향을 묘사한 그림과도 같은 것이었다. 합리적이고 총체적인 계획(지휘자의 총보) 아래 개인에게 주어진 분업화된 업무들(단원들의 파트보)을 묵묵히 수행하는 모습, 그 어떤 예술적 풍경도 이보다 더 근대화의 스펙터클을 정교하게 창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탈산업화 사회에서 근대화의 스펙터클은 ‘근대화 슈퍼’ 시절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사회’나 ‘국가’를 표상하는 일사불란한 오케스트라의 은유는 ‘완전 고용’에 가깝던 옛 시절에나 통했다. 멀게는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의 붕괴부터 가깝게는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분업화된 업무는 무책임과 방관을 낳았고, 대의적 체계는 부패와 부도덕, 경제적 양극화를 확대 재생산해 왔을 뿐이다. 조화로운 합주를 만드는 거대한 오케스트라로 한국 사회를 표상할 수 있으리라고 이제 더는 믿기 어렵게 되었다. 전직 대통령에게 지휘봉을 선사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퍼포먼스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던 것도 다른 정치적 이유에서라기보다는 그 시대착오적 성격 때문이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더 이상 개인들의 조화로운 목소리를 이끌어낼 수 없는 사회에 대한 분석과 처방을 ‘근대의 근대화’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제시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건설한 도시, 즉 ‘새마을’이 전통적 ‘마을’에 대한 부정이었다면, 그 ‘부정의 부정’으로서 ‘근대의 근대화’는 ‘마을의 재발견’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때의 재발견된 ‘마을’은 혈연, 지연과 같은 연고주의에 얽매이지 않는 개인들의 자발적 공동체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다시 오케스트라의 은유로 돌아온다면, ‘근대화의 스펙터클’을 과시하는 전문 연주자들의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마을 오케스트라’ 혹은 ‘공동체 오케스트라(community orchestra)’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정치적 은유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국가주의에 바탕을 둔 ‘대의 민주주의’로부터 지역에 바탕을 둔 ‘참여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구체화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2014년부터 3년째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축제를 개최하고 있는 세종문화회관에 따르면, 성인 중심의 자생적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만 전국에서 395개 단체가 운영 중이라고 한다. 그밖에 학교 오케스트라와 동문 오케스트라 등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까지 합산하면 무려 768개 단체에 이른다. 오케스트라는 단순한 음악 양식이나 수단이 아니다. 기획과 연습, 연주회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에 합리적 소통 모델이 적용되는 사회나 공동체 그 자체다.
음악이 다가올 사회에 대한 ‘예언자적 성격’을 갖는다는 자크 아탈리의 주장 역시 이런 맥락에서 곱씹어볼 만하다. 번번이 ‘국론 통합’을 외치는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모습에서 ‘근대화 슈퍼’의 촌스러운 풍경이 겹쳐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21세기의 시민들은 이미 서로 다른 목소리들을 스스로 조화시켜가며 서로 다른 색깔의 공동체들을 만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지휘봉을 저 찬란한 ‘근대화의 스펙터클’을 위해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최유준 전남대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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