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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장기 내내 텔레비전에서 국회의원들이 싸우는 광경을 보며 자랐다. 그들은 맨주먹으로 뒤엉켜 싸우기도 하고, 몽둥이 같은 것을 휘두르기도 하고, 테이블 위로 올라가 상대방을 겨냥하여 몸을 날리기도 했다. 목청이 터져라 소리치기도 하고, 문을 잠그거나 때려부수기도 했다.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생각이 많아졌다. 다 큰 어른들이, 벌건 대낮에,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밑바닥까지 드러내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싸우는 걸까…. 궁금했다. 초등학생들도 고학년만 되면 그런 식으로 싸우는 것을 부끄러워하는데. 더욱 궁금한 사실은 그 난폭한 폭력 장면에 대해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왜 그토록 분노에 차서 싸우는지, 싸우는 방법 말고 다른 해결책은 없는지, 그런 관행을 멈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 아닌지.

어리고 어리석은 마음에 그랬을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싸우는 광경을 ‘국회 액션 누아르’라 이름 짓고 마치 영화를 관람하듯 바라보곤 했다. 오래 보아온 덕에 그것에 대해 몇 가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그 정도 폭력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라는 것을. 오히려 그런 종류의 폭력은 권력자의 특권이자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이라 여긴다는 것을. 무엇보다 우리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 외에 다른 문제 해결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그것이 실은 내면의 분노를 외부로 투사하는 미숙한 갈등 처리 방식이라는 것을. 진짜 홍콩 액션 누아르를 관람할 때처럼 애잔하고 쓸쓸한 정서가 가슴 밑바닥에 고이는 듯도 했다.

인생은 갈등을 처리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내면의 불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생의 성패가 달려 있고, 자기 분노를 어떻게 소화시키느냐에 인격의 성숙이 달려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내면 갈등을 처리하고 문제 해결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국회 액션 누아르’와 함께 서로에게 분노를 투사하는 법을 배웠다. 온 국민이 그것을 학습하여 가장은 가족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고, 형은 동생에게 그렇게 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중삼중으로 물려받은 분노가 쌓여 있는 듯 보인다.

아기 때는 엄마가 아이의 분노를 안아주고 소화시켜주어야 한다. 그래야 아기가 분노를 달래는 법을 배워서 내면의 분노를 통합할 수 있다. 그러나 아기의 불편한 감정을 달래주지 않을 뿐 아니라, 왜 엄마를 귀찮게 하느냐고 짜증까지 부리는 부모는 그런 방식으로 아이에게 분노를 물려주었다. 또한 우리는 사회적으로 분노를 학습해왔다. ‘홍콩 액션 누아르’는 영화를 감상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예술 치료의 기능이 있다. 그러나 실제 사건인 ‘국회 액션 누아르’는 불안과 공포를 퍼뜨리는 기능이 있다. 온 국민에게 미숙한 갈등 처리법과 폭력적 문제 해결법을 학습시키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감정적 갈등을 처리하고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태도
어른들이 먼저 보여준다면 아이들은 절로 따라 배울 것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면 그들이 겪는 감정적 불편 중 으뜸은 분노를 처리하는 문제이다. 건강하게 분노를 해소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이들은 화가 날 때 스스로를 달랠 줄 몰라 고통스러워한다. 쉽게 자기보다 약한 자를 공격하거나, 혹은 자기를 공격하여 우울감에 휩싸인다. 우선은 분노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분노는 본질적으로 받지 못한 사랑이다. 지금 받지 못한 사랑뿐 아니라 무의식 깊은 곳에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마음이 분노의 근원이다. 치유는 인식의 변화에서 온다. 실제로 사랑을 못 받은 게 아니라 유아기의 미숙한 인식으로 인해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무의식이 형성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분노의 문제가 해결된다.

분노는 또한 울지 못한 울음이다. 화난 아이들을 달래보면 처음에는 버팅기면서 화를 내다가, 그것을 계속 받아주면 어느 순간 분노를 누그러뜨리며 훌쩍이기 시작한다. 혼자 있는 게 무서웠다거나, 동생만 예뻐해서 화가 났다고 속맘을 표현한다. 어른들의 분노 해결법도 같은 과정을 거친다. 박해받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한 후 충분히 슬퍼하지 못해 화가 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슬픔이 온다.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부모에 대해 가여운 마음이 깃든다. ‘국회 액션 누아르’를 연출하는 부모 세대가 자기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아왔으며 그들로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슬픔과 함께 분노가 녹아내린다.

만약 우리가 성장기에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이 갈등을 성숙하게 해결하고 문제를 순조롭게 풀어나가는 장면을 보고 자랐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자기 주장만을 밀어붙일 게 아니라 상대 입장을 배려하면서 협상안을 찾아내고, 자기 이익만을 염두에 둔 채 상대를 굴복시킬 게 아니라 윈윈 전략을 사용하고, 서로 극단으로 치달을 게 아니라 제3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면. 그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로를 비난하면서 화내고 싸우는 것은 약자의 생존법이다. 자기 삶을 주도할 힘이 없다고 느끼거나, 힘 있는 타인이 자기를 통제한다고 느끼는 자들의 반응이다. 강한 사람은 고요하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갈등을 처리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에 묵묵히 자기 삶을 살아간다.

‘국회 액션 누아르’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엉뚱하고 이상하게 관대한 문화를 많이 가지고 있다. 술 취한 채 행한 일에 대해 관대한 문화도 이상하다. 맨정신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술자리에서 취한 채 소리지르며 해결하는 방식은 이상하다. 지나친 음주 자체가 벌써 문제를 회피적으로 처리한다는 의미이다. 인터넷 공간을 메우는 악플에 관대한 문화도 이상하다. 우리가 폭력에 무감각해서 그런지,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지, 혹은 서로 이익이 얽혀 있어서 그러는지 알 수 없다. 현직 고등학교 상담 선생님이 들려준 말에 의하면 인터넷이 생기면서 학교 화장실 벽의 낙서가 깨끗하게 사라졌다고 한다. 화장실 벽에 낙서하거나 악플을 쓰는 것 말고는 내면 갈등을 해결할 줄 모르는 청소년들을 처벌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들에게 감정적 갈등을 처리하는 법,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태도,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아니, 어른들이 먼저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절로 보고 배울 것이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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