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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술은 인간의 기억을 컴퓨터 속에 무한대로 외재화(外在化)함으로써 순간적인 정보처리가 가능한 것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미 웬만한 개념어나 사물의 이름을 입력해 검색하면 너무나 많은 정보가 떠서 도저히 소화하기가 어렵습니다. 컴퓨터는 불필요한 정보를 스스로 삭제하지 못합니다. 꼭 필요한 핵심을 제외한 것을 삭제할 수 있는 능력은 유일하게 인간만이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물리적인 시간과 심리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준다면 정말 좋겠지요.


그래서 미래의 책은 “바로 이 ‘시간’과 ‘여유’와 ‘시행착오’를 대신하는 것이 돼야만 할 것”입니다. 2001년 졸저 <디지털 시대의 책 만들기>에서 처음 언급한 이래 저는 누누이 이 점을 강조해왔습니다. 잘게 쪼개진 하나의 주제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힘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책, 풍부한 사례를 예시하되 이야기성이 강한 책이어야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는 최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두 권을 한꺼번에 내놓았습니다. 두 권은 책을 편집하는 과정까지 포함해 불과 5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답니다. 1권은 북규슈 3박4일과 남규슈 2박3일, 2권은 아스카와 나라를 3박4일 동안 다녀온 답사여행의 보고서 형식입니다. 물론 글에는 유 교수가 평생 동안 다녀온 경험과 습득한 지식이 잘 녹아 있습니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


아마 유 교수의 머릿속에는 일본을 여행하면서 직접 본 것이나 책에서 읽은 것들이 켜켜이 쌓였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그래픽 디자이너인 스기우라 고헤이 선생은 이것을 ‘중층성’(다층성, 다중성)이라고 말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모아쥔 손가락이 하나로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살아 있다는 뜻이죠. 그렇게 되면 보는 것은 듣는 것과 같으며 듣는 것은 만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공감각 체험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사람이 어떤 ‘외부 자극’ 때문에 “‘깜짝 놀랄 때’에는 눈이나 귀, 손과 다리, 뇌와 내장… 그런 구별 따윈 문제가 되지 않지요. 피부로 싸인 전신이 ‘와!’ 하고 놀랍니다. 날아오른다는 말처럼 한순간 신체는 한 덩어리가 되어 공중에 뜹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하나’가 되는 것, 이렇게 하나가 되는 순간은 온몸이 최고조에서 움직이는 한순간입니다.” 여기서 ‘외부 자극’을 출판 기획이라 칩시다. 그런 자극이 왔을 때 유 교수는 자신의 주먹 안에 중층적으로 쌓인 것을 한순간에 펼쳐 내보였습니다. 그것이 이번에 나온 책입니다. 스기우라 선생은 “꼭 쥔 하나의 주먹, 이것이야말로 전 우주이며, 전 세계를 담은 진실한 자신”(이상 인용은 <현재 진행형 디자인>, <기획회의> 168호, 2006·1·20)이라고 말했습니다.


2006년 일본 베스트셀러 1위인 <국가의 품격>은 경제지상주의와 글로벌화를 비판하면서 무사도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역설한 책입니다. 저자인 후지와라 마사히코는 무척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출판기획자는 그에게 처음부터 책을 펴낼 목적으로 두 차례의 강연을 부탁했습니다. 이 기획자는 엄청난 베스트셀러인 <바보의 벽>도 펴낸 바 있는데 저자인 요로 다케시는 “내가 ‘쓴’ 책은 아니지만 내가 ‘말한’ 책은 맞다”는 취지로 서문을 썼습니다.


두 책이 700만부나 팔리는 공전의 인기를 끌자 일본에서는 ‘과거에 실력 있는 편집자는 유명 저자의 화장실 문고리를 많이 잡아본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저자에게 말을 잘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편집자에게는 무엇보다 ‘북앵커’ 능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영상시대는 시청각의 시대입니다. ‘듣는’ 행위는 ‘말하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말하는 이는 듣는 이와 대면하면서 눈높이를 맞추어야 합니다.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물과 사건의 형태인 적절한 사례(팩트)를 잘 제시해야 합니다. 추상적이지 않은 구체적인 사례여야 이해가 쉽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경향DB)


지금은 대중이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활자문화 시대에는 만인이 우러러보게 만드는 ‘문체’가 중시됐지만 지금은 단숨에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이야기’여야 합니다. 소설이라고 다르지 않겠지요? 올해 여름에 인기를 끄는 소설도 이야기성이 강한 것 일색입니다. 트위터의 짧은 문장도 영화 한 편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야 대중의 마음을 단숨에 휘어잡을 수 있습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국내편 모두는 잡지에 연재한 다음 책으로 묶었습니다. 책으로 묶으면서 정교하게 다듬었기에 단단한 구성이 강점이었습니다. 잘 짜인 단편들을 묶어 놓았다고나 할까요? 7권은 여러 번의 경험을 녹여낸 복합적 구성의 이야기라 잠시 내려놓고 쉬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읽어야만 했습니다.


일필휘지로 단숨에 토해냈다는 일본편은 느슨한 구성의 장편소설을 읽는 것처럼 편안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읽는 장점이 대단했습니다. 유 교수가 글쓰기의 여러 층위를 다양하게 보여주는 것 같지만 어쩌면 말하는 방식을 자주 바꾸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게 20년 이상 인기를 끄는 비결이 아닐까요? 신구어(新口語) 시대에 말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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