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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원작의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5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동원했다 해서 서둘러 보았습니다. 역시 어머니 이야기더군요. 어려울 땐 웃고 울리는 감동의 가족 이야기가 뜨게 되어 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등장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대표적입니다.
“평범한 나라에, 평범한 집에, 평범한 아이로 태어나서, 계속 평범하게 살다 죽는” 게 꿈인 간첩 원류한(김수현)은 어머니의 안전만 책임져 주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사람입니다. 밤마다 북의 친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그는 남쪽의 엄마인 달동네 슈퍼 주인에게 “엄마 아프지 마요”라는 글을 담벼락에 새겨놓고 떠납니다. 엄마에게 매달 20만원씩 받은 월급 모두를 입양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동네 여인에게 줍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는 남의 엄마가 몰래 챙겨준 월급통장을 넘겨봅니다. 그 통장에는 “동구 월급 … 우리 동구 월급 … 우리 둘째아들 … 아들 장가밑천”으로 명목이 바뀌며 월급도 10만원씩 올라가 있더군요.
그러면 아버지 이야기는 어떨까요? 1996년 김정현의 <아버지>에서 아버지는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버림받고 쓸쓸히 죽어갑니다. 2000년대 초 <가시고기>(조창인)에서는 간암에 걸린 아버지가 각막을 팔아서까지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려고 합니다. 이들은 사실상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들이었습니다.
2003년에 ‘카드대란’이 터지자 드디어 <남자의 탄생>(전인권)이 이뤄집니다. 여기서 남자는 아버지입니다. 평생을 ‘권위주의’와 ‘자기애(나르시시즘)’라는 동굴에 갇혀 주위를 살펴보지 못한 인생이니까요. 젊은 작가 김애란의 첫 소설 <달려라, 아비>(2005)의 아버지는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알고 집을 나간 뒤 죽을 때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입니다. 이렇게 아버지는 언제나 ‘폐기품’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버킷리스트’를 실천하는 힐링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이 폐지되고 아빠가 아내 없이 자식과 함께 여행하는 <아빠! 어디 가?>가 MBC의 간판 오락프로그램으로 떠올랐습니다. 하기 싫은 일도 적극적으로 하는 아빠가 드디어 제 역할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MBC <일밤-아빠! 어디가?>
박범신의 소설 <소금>(한겨레출판)의 주인공인 선명우의 인생은 가출 전과 가출 후로 나뉩니다. 가출 전의 아버지는 빨대 하나 들고 세상의 구조에 충직하게 복무하던 아버지였습니다. 자식들에게 겨우 은행의 지불 창구 직원이나 가사 도우미 취급을 받았습니다. “불가사리 같은 자본 중심의 체제에 기생해 그 역시 빨대를 꽂고 죽어라 빨았으나, 넷이나 되는 처자식이 그의 몸뚱이에 빨대를 또한 꽂고 있었으므로 그가 빨아올리는 꿀은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체제는 그에게 약간의 꿀을 제공하는 대신, 그를 계속 노예 상태로 두고 부려먹기 위해 그의 후방에 있는 처자식을 끊임없이 부추겨 그가 빨아 오는 꿀을 더 재빨리 소모시키도록 획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은 모두 체제가 만든 덫에서 헤어나기 어려웠습니다. 위정자들은 일반인보다 더 큰 빨대인 ‘깔때기’, 일종의 ‘괴물 빨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적 세계 구조에서 아버지들은 그 체제에 항거할 능력이 전무”했습니다.
소금밭에 쓰러져 죽어가는 아버지를 향해 “달려갈 수도 없고 뒷걸음질 쳐 도망갈 수도 없었던” 경험이 있는 선명우는 막내딸의 생일날 실종됩니다. 아니 딸의 생일 선물을 찾으러 가다가 소금 자루가 실린 트럭의 가족과 조우한 그는, 그들로 인해 드디어 ‘통각’의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새로운 아버지로 다시 탄생합니다. 생산성이나 효율 따위를 집어던지고 모든 불안에서 벗어난 새 가족의 아버지가 되어 ‘삶의 주체’로 거듭납니다.
<도중하차>(기타무라 모리·새로운현재)의 주인공은 30대 후반에 잘나가는 잡지의 편집장이 된 아버지였습니다. 아들이 여섯 살 되도록 놀아준 적이 없습니다. 매일같이 마감에 쫓기다보니 깨어 있는 아들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폐소공포증에 시달리게 되면서 비행기와 기차을 탈 수 없게 됐습니다. 공황장애 판정을 받은 그는 조용히 회사에 사표를 냅니다. “참 어렵게 올라갔는데,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여섯 살의 아들과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아빠와 놀지 않으려 했던 아들이 네 번째의 동반여행에서 “아빠는 나를 제일 좋아하는구나”라고 말해 아버지는 7시간의 힘겨운 기차여행마저 거뜬히 이겨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병을 숨기려 했지만 어린 아들은 처음부터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아이는 항상 그렇듯, 어른의 생각 그 이상”입니다.
<도중하차>에 “상사도 부하도 아니고, 친구도 지인도 아니며, 가족도 아닌 입장. 모든 관계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인간을 성장시킨다”는 조언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의 빨대를 빨아대는 아버지의 자리를 포기할 때 진정한 아버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모두의 생명을 살리는 소금 같은 진정한 아버지의 자리로 돌아와 감동적인 귀가를 하시지 않으렵니까?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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