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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이 넘게 지났습니다. 새 정부가 출범한 후 실물 경제가 갈수록 침체되고 있음에도 정치권은 소모적인 정치적 이슈만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이래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큰 위기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한심한 정치권 때문에 올해도 그런 위기를 겪을 것 같은 공포감이 우리를 엄습하고 있습니다.
증거를 대라고요. 큰 위기에는 소설이 잘 팔립니다.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는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와 이우혁의 <퇴마록>이 등장하며 판타지 소설이 크게 떴고, 2003년의 카드대란 때는 ‘귀여니 신드롬’이 불면서 인터넷소설 열풍이 불었으며, 2008년의 글로벌 외환위기로 경제성장이 멈추다시피 했을 때에는 성장소설 붐이 대단했습니다.
작년만 해도 독자들은 소설을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초여름에 접어들면서 소설이 출판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7년의 밤>의 작가 정유정은 <28>(은행나무)을 내놓았습니다. 조정래의 <정글만리>(해냄), 김려령의 첫 성인소설 <너를 봤어>, 정이현의 <안녕, 내 모든 것>(이상 창비),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 이정명의 <천국의 소년>(열림원) 등의 신작소설은 신경숙의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문학동네)와 박범신의 <소금>(한겨레출판) 등과 혈투를 벌일 태세입니다.
높은 선인세로 화제의 중심에 오른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민음사)는 예약판매만으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으며, 넬레 노이하우스의 <사악한 늑대>(북로드),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문학수첩),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문학동네), 오쿠다 히데오의 <소문의 여자>(오후세시),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마음산책) 등 외국 소설의 강세도 만만찮습니다. 베르나르 피보가 격찬했다는 조엘 디케르의 <해리쿼버트 사건의 진실>(문학동네)도 곧 가세할 것입니다.
하루키 신작을 사자 (경향DB)
출판사들의 기대작이 책이 가장 많이 팔리는 휴가철을 겨냥해 출간되는 바람에 소설을 즐기는 독자들은 행복한 비명을 질러야 할 판입니다. 이리하여 연말에는 2013년 출판시장을 소설이 주도했다는 정리를 미리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어떤 소설이 과연 승리자가 될까요? 지난 15년간의 소설 시장의 변화를 통해 한번 예상해보겠습니다.
1998년과 2003년 사이에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린 순애(純愛)소설 붐이 대단했습니다. <국화꽃 향기> <가시고기>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등의 밀리언셀러는 IMF 외환위기로 가족 해체의 위기를 겪은 이들의 진정한 속마음을 알려줬습니다.
장진영, 박해일이 출연하는 영화 '국화꽃향기'
2003년과 2008년 사이에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필두로 한 팩션소설의 열풍이 대단했습니다. <칼의 노래>(김훈)를 비롯한 한국형 팩션과 인문서들도 큰 인기를 끌었지요. 45세가 정년이라는 ‘사오정’이라는 단어가 2003년에 처음 등장한 이래 삼팔선, 삼초땡, 이태백 등 직장인의 고뇌를 알려주는 단어의 나이가 밑을 잊은 것처럼 낮아지자, 현실의 고단함에 지친 개인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해체된 팩션으로 고통을 잠시 잊고 싶었던 게지요.
2008년과 2013년 사이에는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소설들만 불티나게 팔려나갔습니다. 오죽했으면 소설은 그 자체의 힘으로 팔리는 ‘본원적 상품’이 아니라 영상작품에 기댄 ‘파생상품’에 불과하다는 자탄의 소리가 쏟아져 나왔을까요? 하여튼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왕 역할을 했던 김수현이 팬덤의 규모를 엄청나게 키우는 바람에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인기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제공 <은밀하게 위대하게> _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제공
그렇습니다. 소설에서 영상의 힘은 점차 강화됐습니다. 1998년에는 <편지>를 비롯한 영화 원작을 소설화한 영상소설이 인기를 끌었다면, 2003년에는 <파페포포 메모리즈>를 비롯한 카툰 붐이 대단했습니다. 2008년에는 이름 있는 작가들은 모두 인터넷 속으로 들어가 장편소설을 연재했지만 스토리텔링 자체를 바꾸지 않는 바람에 동력은 곧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웹툰 원작의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최고의 기록을 쓰고 있는 올해는 웹툰이 상한가를 치고 있습니다. <레 미제라블> <안나 카레니나> <위대한 개츠비> 등 영화의 원작 고전들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자, 이제 결론을 내리지요. 저는 소설 내부에 영상적인 서사를 건축적인 구조처럼 강고하게 구축한 소설이 앞으로 문학 시장을 평정할 것으로 봅니다. 인구 29만명의 화양시가 불과 28일 만에 피폐화되는 과정을 그린 정유정의 <28> 같은 작품 말입니다. 이 소설은 인물의 시점이 바뀔 때마다 카메라 앵글이 바뀌는 것 같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 경우에 시나리오를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접속사를 발견할 수 없는 빠르게 반복되는 짧은 문장의 심리 묘사, 울림이 강한 사회적 메시지, 힘이 넘치는 웅장한 문체, 상상력을 자극하는 적절한 대비와 은유, 등장인물들의 물고 물리는 대립 구도, 시선의 차이를 통해 안겨주는 넉넉한 상상력, 사선을 넘나드는 공포 속에서도 결코 잃지 않는 따뜻한 인간애, 스스로 진화한 완벽한 구성의 스토리텔링, 액자처럼 자주 등장하는 에피소드의 강렬함 등도 <28>이 지닌 강점들입니다.
정유정은 드디어 한국 대표작가의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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