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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일본의 올해 나오키상 수상작은 아사이 료의 장편소설 <누구>(은행나무)입니다. 이 소설에는 미야마 대학교 4학년생 다섯 사람의 치열한 ‘취활’을 그리고 있습니다. 취활은 취업활동, ‘혼활’은 결혼활동의 준말입니다. 취업이나 결혼이 너무 힘드니 격렬한 활동을 해서라도 꼭 이뤄내야 하는 환경을 반영하는 조어들입니다. <누구>에서는 이들의 취활 이야기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내용과 격자무늬처럼 반복되고 있습니다.


주인공 다쿠토는 월세를 절약하기 위해 고타로의 룸메이트가 됩니다. 고타로의 헤어진 여자 친구인 미즈키의 취활 동료인 리카는 다카요시와 동거합니다. 미즈키가 리카에게 놀러 온 날, 미즈키를 짝사랑하는 다쿠토가 미즈키에게 전화를 하는 바람에 이들이 같은 건물의 위아래층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리카의 집에서 함께 취활을 본격적으로 전개합니다. 외국유학과 인턴이라는 장점이 있는 미즈키와 리카의 주도로 대학 취업 정보 센터에서 받아온 엔트리시트(입사원서)를 미리 써보기도 하고 면접의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도 함께 준비합니다.


그들은 트위터를 통해 140자 이내로 간결하고 짧은 말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한 세대답게 자신의 키워드부터 찾아내고자 합니다. 1차 합격자만을 대상으로 집에서 치러지는 국어, 수학, 영어에 대한 웹 테스트도 함께 풉니다. 이런 것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네요. “이것은 실력을 재는 게 아니라 협력해 줄 친구가 있는가를 조사하는 테스트”에 불과하다는 것이 상식이랍니다.


그들의 협력 전선은 미즈키가 합격통보를 받은 다음부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축하해주지만 속으로는 질투하거나 조롱합니다. 빨리 취업해야 할 남다른 이유가 있는 미즈키가 승진할 수 있는 코스인 ‘종합직’이 아닌, 전근이 없고 승진이 어려운 ‘에리어직’으로 합격한 것과 고타로가 대형 출판사가 아닌 중견 출판사에 취업한 것을 알고는 안도하기도 합니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그들이 속마음을 담은 글을 어디에 쓸까요? 그렇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는 트위터에도, 메일에도, 그 어디”에도 쓰지 않습니다. 오로지 익명으로 개설된 트위터 계정에 속마음을 냉소적으로 털어놓습니다. ‘누구’는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다쿠토의 또다른 계정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리카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여러분이 소설의 끝에 붙어 있는 ‘누구’ 계정의 트위터 글을 읽는다면 놀라운 반전과 인간의 악마성에 경악을 금치 못하실 것입니다.


일본 최대 서점 중 하나인 이케부쿠로 소재 준코도 서점의 문고본 전용 서가. (출처 :경향DB)


2008년에 발표된 이시다 이라의 장편소설 <스무 살을 부탁해>(노블마인)는 와시다 대학의 3학년생 7명이 취업동아리를 결성해서 벌이는 1년 동안의 눈물겨운 취업기입니다. 그들은 1000 대 1 이상의 경쟁률을 기록하는 언론계에 전원 합격하자고 결의합니다. 그룹면접 토론, 인턴 연수,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한 합숙, 언론계 입사에 성공한 선배 방문, 취업 과정 등 모든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한 친구가 히키코모리가 되어 집 밖으로 나서는 것을 꺼리는 바람에 ‘전원 합격’의 공동 목표에 잠시 이상이 발생했지만 눈물겨운 동료애를 발휘해 결국 전원 합격의 공동 목표를 달성합니다. 동아리 리더인 도미즈카 게이가 여섯 군데에 합격하고도 논픽션 작가가 되겠다며 ‘골든 루트’를 차버리는 장면에서는 통쾌함마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두 소설은 5년의 시간차를 두고 발표됐습니다. 그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글로벌 금융위기가 있었고, SNS의 등장이 있었습니다. 1991년에 시작된 ‘잃어버린 10년’은 ‘장기불황 20년’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2011년에는 동일본대지진과 쓰나미,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졌습니다. 그러니 일본 국민들이 심각한 열패감에 빠져드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취업은 정말 중요합니다. 신입사원 일괄입사 전통이 센 일본은 중도채용이 적습니다. 고용시장이 매우 경직돼 있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평생 고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무 살을 부탁해>에서 미즈코시 치하루는 최고의 직장이라는 한 민영방송국 최종 면접에서 아주 사소한 실수로 탈락합니다. 겨우 몇 분 동안 진행되는 면접에서 어떻게 답하느냐로 인간성 전체를 평가받고, 그 결과로 운명이 달라지는 것은 우리 인생의 축소판 같습니다.


일본 기업들이 최근 도쿄에서 실시한 합동 취업설명회. (출처: 경향DB)


대기업의 정규직으로 입사하면 평생 고액연봉을 받으며 떵떵거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비정규직으로 밀려나면 죽을 때까지 저임금의 하루살이 인생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평생임금은 1억엔 이상 차이가 납니다. 게다가 해고는 언제나 비정규직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누구>에 등장하는 것처럼, 12월1일에 문을 연 취업사이트가 순식간에 서버가 다운되기도 합니다.


일본은 집단주의 전통이 매우 강합니다. 지금도 전국시대나 막부 말기 무사들이 할복하는 정신을 리더십의 바람직한 모델로 내세우는 나라이니까요. 그러나 그런 빛나는 전통이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음을 <누구>는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수단으로 등장한 SNS가 관음증과 노출증만 잔뜩 보여주고 실제로는 인간관계를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아마 소설을 읽은 독자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서둘러 SNS 계정을 닫아버리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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