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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마감하면서 기쁜 소식을 들었다. 후배 여성이 딸의 대학 합격 소식을 전해왔다. 그 소식이 특별히 반가웠던 이유는 후배의 딸이 고등학교 입학 한 달 후부터 등교를 하지 않은 채 침대에만 누워 지내는 중증 우울증 상태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딸은 중학교 때까지 리더십 강하고 활발한 학생이었다. 특별히 아빠의 사랑을 많이 받는 딸이었고, 엄마는 딸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었다. 그녀는 가끔 딸이 공주처럼 굴면서 엄마를 시녀처럼 부려먹는다고 느끼기도 했다. 외형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평온한 가정이었다.

후배는 처음에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는 이유를 알지 못해 답답해했다. 아이는 종일 아무 말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엄마가 아이를 차에 실어 강제로 학교에 데려다주면 아이는 금세 조퇴하고 돌아와 방에 처박혀 울었다. 엄마는 다시 아이를 심리상담 선생님에게 데려갔다. 아이를 상담실에 밀어넣고 밖에서 기다리다 끝나면 데려오곤 했다. 학년이 끝날 때마다 수업 일수가 부족할까봐 날짜를 계산하면서 아이를 학교로 데려다주었다. 그 고단한 노력을 3년 동안 하면서 아이는 조금씩 변화했고,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뿐 아니라 대학에도 진학했다.

후배와 통화하면서 딸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제일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딸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그걸 인정하는 데 일 년 이상 걸렸어요. 지금도 딸한테 너무 미안해요.”

이제는 넘어선 과정임에도, 그 이야기를 꺼내는 목소리가 울먹였다. 사실 그녀는 나와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던 독서모임 일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정서적으로 전혀 소통할 줄 모른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쪽에서 어떤 이야기를 건네든 박해적으로 받아들였고, 어떤 대답을 하든 방어적 언어로 표현했다. 그녀는 왜곡된 소통 방식으로 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천천히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하교한 딸이 “엄마, 저기 학원 옥상에서 어떤 오빠가 떨어져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딸의 말을 끊으며 “쓸데없는 일에 신경쓰지마” 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아이가 두려움이나 불안 때문에 그런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아이 마음을 읽어주고 불편한 감정을 달래주어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딸은 엄마로부터 감정적으로 달램을 받거나 정서적으로 소통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후배 여성도 부모로부터 그런 것을 받지 못한 채 정서적으로 내면이 얼어붙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또 물어보았다. 딸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어디였는지.

“내가 딸과 감정적으로 거의 한몸이라는 게 명백하게 보이는 지점이었어요. 내가 화난 상태에서 그것을 참고 있을 때면 딸이 금세 우울해지는 게 보였어요. 내 마음이 편안할 때는 딸도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고요. 그때 분명한 깨달음이 왔어요. 내가 건강해지면 딸이 낫겠구나.”


▲ 학교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
아이를 얼어붙게 한 건 소통 방식 탓
“내가 건강해지면 아이가 낫겠구나”
‘깨달음’ 이후 아이는 기적처럼 좋아졌다


그녀는 자신이 딸을 정서적으로 얼어붙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안 이후 딸에게 건네던 통제의 언어를 거두었다. 잔소리, 야단치기, 걱정하는 말투 같은 것. 그럼에도 답답한 노릇은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감정을 읽어주고 공감해주는 일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 딸이 말을 건넬 때마다 당황하면서 침묵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딸이 우울해지는 게 보였다. 그렇게 서로의 감정을 알아차려가면서 그녀는 분명한 깨달음에 도달했다. 딸을 낫게 하려면 내가 먼저 건강해져야 하는구나. 그때부터 그녀는 심리 상담에 적극 임했다.

우울증이나 폭력 문제로 자녀를 심리상담실로 밀어넣는 부모에게, 전문가들은 부모가 함께 치료받아야 한다고 권한다. 사실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 문제를 이해할 만한 자아도, 문제를 해결할 만한 주체성도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상황을 이해하고 버텨낼 힘이 있는 어른이 먼저 변화해서 뒤늦게라도 아이를 보살펴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녀들은 부모의 정서를 고스란히 흡수하여 동일시하기 때문에 어른이 달라지면 아이들은 절로 변화한다.

후배는 심리상담을 받으며 냉동되어 있던 정서가 풀리기 시작했다. 딸이 어떤 말을 건넬 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딸이 느끼는 불편에 대해서도 달래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정서적으로 엄마 역할을 해주지 못한 점에 대해 딸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녀가 내면의 감정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갈 때마다 진짜 편안해지는 사람은 딸이었다. 딸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변화했다.

후배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자신과 같은 입장의 부모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없는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요.” 문제 해결 과정이 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말을 한들 알아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 주변에도 비슷한 자녀 문제를 겪는 학부모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심리상담 이야기를 꺼내보았지만 다들 귓등으로 흘렸다. 대신 자녀를 대안학교로 전학시키거나 검정고시 준비로 방향을 돌렸다. 자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모가 먼저 치료받아야 한다는 말은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현장에서 일하는 상담 전문가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우리 젊은이들이 참 어려워요.” 그들을 둘러싼 외적 상황도 어렵지만 내면에서 겪는 심리적 문제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들은 왜 마음이 그토록 고통스러운지 이유조차 모르는 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심리 문제의 대물림 현상에 대해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세르주 티스롱은 이렇게 말했다.

“부모 탓에 자기도 모르게 인성이 왜곡된 2세대 부모는 그 자녀에게 전체적으로 뒤틀린 거울 역할을 하는 셈이다. 손자 세대에 이르면 부모 세대에서와 동일한 장애가 나타나는데, 그 증세는 훨씬 심각하다. 이런 장애들의 공통적 특징은 외견상 아무 이유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후배 여성의 딸은 요즈음 댄스스포츠를 배우고, 운전면허 시험을 보고, 친구와 함께 여행계획을 세우고 있다. 돌이켜보면 기적 같은 일이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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