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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일들이 벌어진 한 주였다. 먼저 윤창중 파문. 최초의 여성대통령을 수행하고 방미했던 대변인이 성추행으로 전격 경질당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외신은 이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국내 언론과 달리 정부 고위관료가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보다도 한국에 만연한 성차별 의식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사들이 많았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적한 ‘유리천장’으로 인해 한국 여성이 적절한 사회적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 사건을 윤창중 개인의 문제로 축소시키려는 경향과 이런 외신의 반응은 사뭇 대조적인 것이다. 문제적인 것은 윤 전 대변인의 기자회견이었다. 그는 성추행 사실을 부인하면서 피해 여성에게 잘하라는 격려의 의미에서 “허리를 툭 쳤을 뿐”인데, “문화 차이”로 인해 오해를 빚게 되어 유감이라고 말했다. 한국과 미국이 서로 다른 문화에 속하기 때문에 소통의 문제가 있었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아무리 문화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아무 여성이나 허리를 툭 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윤 전 대변인이 해명이랍시고 쏟아낸 그 내용 자체도 부적절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경향DB)



윤창중에 이은 다른 황당한 일은 시사인 주진우 기자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이었다. 다행히 기각되긴 했지만, 현직 기자가 보도한 내용을 근거로 증거인멸 운운하면서 구속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만약 사법부가 제대로 재판을 하지 않았다면, 성추행 못지않게 국제적인 망신살이 뻗쳤을 사건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국가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광주민주화운동 공식행사에서 부르지 않기로 결정한 것도 황당한 일이었다. 하기야 몇몇 보수인사들은 여전히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 특수군이 개입한 폭동”이라고 말해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주진우기자 영장 실질심사 (경향DB)


국정원 선거개입 수사도 애초의 그것과 달라진 내용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금 혐의들이 모두 사실로 드러난다면, 엄청난 파장을 낳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실마리를 윤 전 대변인이 던져줬다는 생각이다. 바로 “문화 차이”가 그것일 테다. 어떤 “문화 차이”일까? 한국 사회는 지금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한다고 인정해왔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룬 경우가 한국 말고 아시아에 없다고 보수인사들이 자화자찬했던 것은 오랜 일이다.


자신들이 이룬 업적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늘어놓던 보수가 정작 정권을 다시 잡으면서 보이고 있는 행동들은 거의 추태에 가깝다. 게다가 그 추태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보수가 왜 그런 짓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큰소리를 치고 있는 형국이다. 그 이유를 정녕 모르는 것일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민주화의 성과들을 하나씩 되돌려 놓을 때, 한국에 관심을 가진 외국 친구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민주화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가봐?”라는 우스개였다. 한국의 보수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상의 가치라고 주장한다. 북한보다 남한의 체제 우월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이런 주장은 되풀이해서 보수의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동원된다. 그런데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고 있으면 과연 한국의 보수가 자유민주주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윤 전 대변인이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동원한 논리가 “문화 차이”였던 것처럼, 한국의 보수는 자신들의 자유민주주의와 이른바 ‘선진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서로 다르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정신상태에 대한 연구는 정치학의 영역이라기보다 심리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스스로 파괴시키면서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마녀’로 지목해 사냥을 벌이는 짓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의 보수가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한다면,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보편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자신들의 주장에 신뢰성이 생길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진리다. “문화 차이”를 내세워 자신들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보수의 가치라기보다 그 반대의 가치에 속하는 것이다. 보수라면 보편과 통합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미덕이다.


보수가 그토록 강조했던 ‘국격’이라는 것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유지되는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했다는 외국의 평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국의 보수는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열린 사회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이익을 특수한 것으로 포장해 “문화 차이”만을 강조한다면, 한국의 보수가 그토록 혐오하는 북한 같은 닫힌 사회의 인상을 확산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세계 언론이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정부 고위인사의 성스캔들” 따위에 관심이 있어서 한국을 주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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