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정치인과 연예인은 여러 측면에서 서로 닮았다. 한때 ‘폴리테이너’라는 말도 있었지만, 연예인이 정치적 발언을 하거나 정치인이 예능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것도 이제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일상생활과 정치의 관계가 은연중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런 분위기가 썩 나쁜 것은 아니다. 물론 겉모습이 비슷하다고 같은 것은 아닐 테다.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정치인과 연예인은 유사하지만, 그렇다고 둘의 역할이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중예술가’로서 연예인은 기본적으로 감각을 관리하는 존재이다. 감각을 관리한다는 의미는 규범을 확인하고 강화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연예인은 이런 역할에 충실하다.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규범을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아무리 싸이의 ‘젠틀맨’이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상식이 허락하는 표현의 수위를 넘어가기 어렵다.


이에 비한다면 정치인은 새로운 규범을 제시하는 일에 더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이른바 리더십이나 카리스마는 이 과정에서 탄생한다. 규범을 갱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념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운동’이다. 이것을 이루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이념을 구성해서 ‘대중’에게 뿌리 내리게 만드는 일이다. 안철수 의원 같은 정치인이 ‘새 정치’를 내세우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새 정치’라는 용어에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념의 내용은 특정 개인을 통해 내세워진다기보다, 대중의 운동을 통해 채워진다. 정치인이라면 이념의 내용을 채울 수 있게 대중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여기에서 정치인과 연예인이 갈린다고 할 수 있다. 연예인은 이념을 만들어서 그 내용을 채우는 존재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정치인은 때로 연예인과 비슷한 역할을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이념과 대중의 관계를 고민해야 한다.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운문 시에서 오늘날 우리가 듣기에도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 눈이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 생겨났고, 다리가 걷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목적론이 얼마나 사물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의미하는 것인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이다. 눈이 있기에 보는 것이고, 다리가 있기에 걷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치인과 연예인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인과 연예인이 처음부터 그 목적에 따라 정해진 것이라기보다, 그 역할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최근 정치인이 예능프로그램에 등장해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모습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특히 강용석 전 의원 같은 경우는 아나운서 성희롱 파문을 통해 얻은 ‘악명’을 효과적으로 ‘예능 감각’을 통해 해소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정치인과 연예인이 각각 목적을 갖는다기보다 역할에 따라 서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강 전 의원은 훌륭하게 증명했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정치인과 연예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강 전 의원이 ‘악명’을 얻은 영역은 엄연히 정치에 속한다. 그나마 그가 ‘악명’을 벗어날 수 있었던 까닭은 정치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정치를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정치의 영역과 예능의 영역이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정치인이었던 과거의 경력이 희소가치를 발휘했기에 예능프로그램에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정치인으로서 그가 얻을 수 있었던 ‘정보’에서 남들과 다른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비슷한 경우를 과거 <나꼼수>에서 인기몰이를 했던 정봉주 전 의원에서도 찾을 수 있다. 국회의원 신분으로서 알 수 있었던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정 전 의원도 희소가치를 구현할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의 원인을 정치인이었다가 연예인에 가깝게 변신한 개인의 문제로 지목하기는 어렵다. 개인의 도덕성 문제라기보다, 희소가치를 중요한 동력으로 삼는 ‘폭로 저널리즘’과 관계가 깊어 보이기 때문이다. 예능프로그램은 원칙적으로 ‘사연 팔이’의 속성을 가진다. 정치인이 예능의 세계로 나와서 팔 수 있는 사연은 대중에게 희소한 정치인에 대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정치를 논한다면 재미없다. 정치는 ‘재미’의 문제라고 볼 수 없다. 정치가 ‘사연 팔이’로 대체되는 현상은 분명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이 철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남북관계가 김정은이라는 개인의 패악으로 수렴되는 것을 방치하는 정치가 현실에서 무기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좀 더 냉정하고 통합적으로 사안을 바라보면서 포퓰리즘에 얽매이지 않고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진 정치인이 없기에 연예인의 가면을 빌려서 인기를 얻으려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예능프로그램이 국회일 수 없듯이, 정치인도 연예인일 수 없다. ‘새 정치’에 내용이 없다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정치 자체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게 변해야 할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