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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로 대표되는 극우파들이 공개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지칭하면서 1980년 광주 ‘사건’이 유언비어를 통해 촉발된 폭동에 지나지 않았다고 발언하는 중이다. 얼마 전 MBC TV <100분 토론>에 출연한 미디어워치 변희재 대표는 이 사실을 공개 방송에서 인정하면서 광주 ‘사건’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우경화 경향에 대한 다양한 분석들이 이미 있었다. 정리하자면, 보수정권이 젊은 세대의 현실인식을 우편향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라는 견해와 진보정권의 정책 실패가 정치환멸을 불러일으킨 결과라는 입장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100분토론 화면 캡처
물론 이런 견해와 달리, 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광주 ‘사건’의 제도화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국가 보상은 이와 같은 제도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운동’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인준함으로써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국가유공자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이 과정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광주가 더 이상 ‘사건’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사건’은 이렇게 ‘상태’로 바뀐다. 국가가 ‘사건’을 포섭하는 과정은 그것에 대한 기억을 기념관에 집어 넣는 것이다. 그 재현의 체계가 바로 국가라는 ‘상태’이기도 하다. ‘사건’이 얼어붙은 ‘상태’, 그것이 곧 국가인 셈이다.
극우파의 의혹은 이 ‘상태’에 대한 문제제기다. 히틀러가 말한 것처럼, 극우주의의 핵심은 ‘강인함’에 있다. 이 ‘강인함’은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고 그 객관성에 주관성을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극우주의는 극좌주의와 일맥상통한다. 객관성을 해석하는 관점이 다를 뿐, 사실상 객관성과 주관성의 일치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베에서 극단적 발언을 쏟아내는 극우파들이 ‘팩트’를 강조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팩트와 주관성 사이에 괴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애초부터 거부하는 것이 극우파의 인식체계다.
히틀러는 모두를 위한 식량이 부족할 때, 우리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배제할 수 있는 강인한 존재가 바로 파시스트라고 말했다. 공산주의자는 나약해서 우리를 위해 남겨둬야 할 식량을 쓰레기 같은 타인에게 ‘퍼준다’는 것이 히틀러의 인식이었다. 진보정권이 10년간 별다른 반성도 없이 도입했던 숱한 신자유주의적인 경쟁논리의 핵심은 ‘될성부른 나무만 키워주자’는 주장이었다. 히틀러의 논리와 어슷비슷하다. 이 경쟁구도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들이 진보의 이념에 회의를 품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지금 일베를 비롯한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문제제기는 결코 하루아침에 발생한 결과가 아니다.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는 현실성이 이미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 현실성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킨 멋진 자본의 신세계다. 이 신세계를 만들어내는 주역 중 하나가 198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는 소위 진보정권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일베의 극우주의는 바로 이런 현실성에서 자라난 독버섯인 것이다. 한때 보수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던 그 냉소적 주체의 풍자와 해학이 이제 기득권화된 진보를 대상으로 삼게 되었을 뿐이다.
문제는 이런 우경화를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얼빠진 보수일 것이다. 이런 극우주의가 보수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지난 역사가 말해주고 있는 교훈이다.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잘 보여줬듯이, 극우주의는 보수주의의 위기를 반영하는 증상이다. 보수의 위기가 곧 극우파의 성장을 촉진한다.
선진국의 경우 극우주의가 보수의 적으로 간주되는 반면, 한국의 보수는 극우주의에 대한 인식이 희박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전쟁과 독재라는 극단적 경험을 통과하면서 인권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자기계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진국들은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를 지속적으로 조장하는 경우 법으로 규제하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이런 문제에 대한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지 못하다. 일베가 최근 집중 조명을 받고 있긴 하지만, 약자를 비웃고 조롱하는 것을 도처에서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일베가 곧 우리의 일상인 셈이다.
물론 한국에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극우주의가 유럽이나 일본처럼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구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들 대부분이 자신의 결핍을 법에 호소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적 극우주의는 현실에 대한 적절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기보다, 과거에 치열했던 진보와 보수의 대립구도에 대한 향수를 내포하고 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피아식별법이 이들에게 그리운 것이다. 마치 냉전시대를 그리워하는 반공주의자들처럼, 이들이 추억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제는 자취를 감춰버린 진보의 급진주의라고 하겠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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