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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꾸준하게 한국 정치와 관련한 논의를 펼쳐온 영국의 정치학자 케빈 그레이는 영국에서 발간되는 ‘뉴레프트 리뷰’에 기고한 한국 대선 관련 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1987년에 발생했던 수동적 혁명을 진척시킬 완벽한 형상”으로 호출되었다고 진단했다. ‘87년 체제’의 교착상황을 풀기 위한 보수의 약진이 박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망은 그렇게 밝지 않다는 결론이다. 정치와 경제 모두에서 박 대통령의 정부는 난항에 봉착해 있다는 판단을 그레이의 논의에서 읽을 수가 있다.


그레이의 진단이 얼마나 옳은지 지켜봐야 하겠지만, 실제로 한 달 동안 전개된 상황만을 놓고 보면 우려의 시선을 거두기 어렵다. 당과 정부와 청와대가 따로 노는 모습은 리더십 부재라는 말 이외에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당연히 지지율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다. 역대 정부 중에서 최하위 지지율이 나온 배경은 어떤 변명을 끌어다 붙이더라도 어물쩍 넘어갈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등장은 이명박 정부에 이은 보수의 지속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상황은 정반대일지도 모른다. 향후 5년이 한국의 보수에 유리한 국면일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박근혜 정부는 보수의 위기를 보여주는 증상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보여준 인선 난항과 리더십 부재는 과연 우연일까? 그레이도 지적하듯이, 오히려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달리 지금 한국의 보수는 주변국의 영향을 벗어난 자기결정권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경향DB)


지난 선거에서 인기를 끌었던 경제민주화와 복지라는 의제는 보수의 위기를 무마하려는 대책이었다. 당명까지 바꾸면서 새누리당은 민심을 얻고자 안간힘을 썼다. 이런 배경을 업고 등장한 것이 박근혜 정부인 셈인데, 그러나 정작 새로운 ‘보수’ 정부는 선거 기간에 내세운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지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준비된 여성대통령’이라던 박근혜 정부는 출범 한 달이 지나도록 안갯속에 묻혀 있다. 특히 새로운 정부의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는 ‘창조경제’를 당정 관계자가 제대로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하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용어 정의를 놓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창조경제’가 1990년대 이래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를 기화로 다시 등장한 종북논쟁도 보수의 위기를 극복하기보다 부추길 공산이 크다. ‘87년 체제’라고 명명할 수 있는 한국의 민주주의 제도는 공화국의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규정은 보수에 불안을 선사해왔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는 우상 파괴의 속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자동적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보수라면 제대로 자신의 위치를 보전하기 위해 사회적 연대의 가치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종북논쟁은 결과적으로 적과 아를 갈라서 전자를 척결함으로써 ‘위생적인 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는 공화주의의 이념을 더욱 강화하는 논리다. 종북논쟁은 지난 대선 기간에 보수가 구축했던 사회적 연대의 이미지를 파괴하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심판이라는 마녀사냥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보수가 종북논쟁을 통해 공화주의를 전유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진보는 ‘독재의 계승’이라고 박근혜 정부를 비판함으로써 공화주의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대선 패배 힐링 영화’라고 규정했던 그 태도에서 이런 심중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선거를 혁명에 비견하는 이런 과대망상이야말로 진보가 왜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 보여주는 가장 적실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선 패배는 실패한 혁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의 상황은 21세기 한국과 동떨어진 것임에도 애써 유사성을 발견해서 위무를 받으려는 행위는 적절한 방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의 출현은 진보든 보수든 실질적인 공화주의를 실현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에 이은 또 다른 보수정권의 출현이라기보다, 한국의 보수가 자기 한계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수첩’에 적힌 인력들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에서 상황은 한편의 소극으로 전락한다. 독재자의 딸을 청와대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한국의 보수는 ‘87년 체제’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보상받고 싶었으리라. 많은 이들에게 한국 보수의 뿌리 같은 것이 박정희이지만, 정작 박정희는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파시스트였고, 시장주의에 적대적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이런 측면에서 박정희 체제의 계승일 수가 없다.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로 이미 들어와 버린 한국의 보수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박근혜 정부는 ‘불가능한 박정희’를 보여준다. 더 이상 효용성을 가질 수 없는 박정희를 확인시키는 것이 박근혜 정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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