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베네딕트 앤더슨은 최근 뉴레프트리뷰에 기고한 글에서 동남아국가의 작가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해당 국가 엘리트층의 무관심을 꼽았다. 서양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이 자국의 문학작품을 읽지 않아서 ‘민족작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이런 앤더슨의 말은 다른 감각의 훈련이 필요한 근대문학의 독자로서 엘리트층이 일정하게 계몽의 역할을 수행했어야 한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한국은 유별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앤더슨의 지적이 옳다면, 한국의 경우는 자국의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들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제기해야 할 질문은 ‘한국문학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일 테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엘리트층은 왜 자국의 문학작품을 읽었는지, 그 의문이다. 이인직이나 이광수가 일본에서 수학한 뒤 돌아와서 했던 일도 결국은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당시 지식인들이 ‘문명화’라고 불렀던 ‘계몽’에서 문학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부지불식간에 인식하고 있었다. 이인직이나 이광수가 일본 제국주의와 근대문명을 동일시했던 것이라면, 해방 이후 상황은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분단과 전쟁을 거치긴 했지만, 여전히 문학은 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문학이 역사의 굴곡에 따라 날줄과 씨줄을 이루면서 엮여 있다는 것, 이를 통해 한국의 작가가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게 범상한 일은 아닌 셈이다.


최근 광주민주화운동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논란이 인터넷상에서 일어나기도 했지만, 80년 광주의 경험에서 촉발된 문학의 존재는 부인하기 어렵다. ‘팩트’를 강조하는 입장은 문학을 간단하게 ‘허구’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문학이야말로 ‘팩트’로 재현되지 않는 것들을 알려주는 메신저이다. 사건은 ‘팩트’를 통해 재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팩트’는 사실상 그 안에 담기지 않는 것을 배제한다. 문학은 바로 이렇게 배제된 것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과거에 홀려버린 행위’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논란이 일어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동안 한국 사회가 소홀하게 취급해온 과거들이 복수를 하는 것에 가깝다. 일베 현상은 바로 이 지점에서 돌출한 것이다. 소위 ‘87년 체제’라는 것은 진보와 보수의 타협을 통해 탄생했다. 87년 6월항쟁이 시민과 국가의 충돌로 파국을 맞을 수도 있었지만, 원인이야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극적인 타협에 이르게 되었다. 그 이후 목격한 것은 광범위한 타협주의였고, 그 결과로 우리는 박근혜 정부의 출현을 맞이했다.


6월항쟁 (경향DB)


소위 ‘87년 체제’는 타협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진보나 보수 모두에게 혜택을 주었지만 동시에 불만도 주었다. 민주주의가 가져다준 혜택에 만족하면서도 불만을 제기하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가 있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체제라기보다, 그 불완전성으로 인해서 가치를 갖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특정 세력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만인의 것이다.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민주주의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엘리트층을 통해 통치하는 방식이라고 해도, 민주주의라는 대의는 기존의 정치체제에 끊임없이 ‘민주화’를 요구할 수 있게 만든다.


이 과정 전체가 민주주의인 셈이다. 이런 까닭에 민주화를 주도했던 세력에게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것처럼 비칠 수도 있겠지만, 자신들의 목표가 수립되는 순간, 이들은 개방된 풀장 안에서 노는 여러 아이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일부는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는 그것을 반대한 이들조차 혜택을 허락하는 체제라는 점에서 어쩔 수가 없다.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만 봐도 민주주의의 역설은 참으로 적나라한 측면을 드러낸다. 이런 민주주의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입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 가치는 근대국가의 표상처럼 거론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민주주의라는 가치 자체에 대한 의문이 공공연하게 제기되고 있는 한국에서 그 한계를 논한다는 것은 시기상조인 느낌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의 역설이 말해주는 교훈은 분명히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


표현의 자유 퍼포먼스 (경향DB)


지금 운위되고 있는 ‘민주화’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타협주의를 통해 이루어진 소위 ‘87년 체제’에 대한 교조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교훈은 의미심장하다. 80년 광주를 통해 우리가 이룬 ‘민주화’는 무엇이고,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제거되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용어는 완벽하게 80년 광주를 재현하고 있는 것일까? 우파가 제기하는 ‘팩트’와 다른 차원에서 이미 던져졌던 많은 질문들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80년대의 문학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것을 위한 작은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고고학자처럼 우리는 그 속에서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역사의 유령들을 대면해야 할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