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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희망버스가 폭력 논란에 묻혀 본래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지난해 방한해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만나고 돌아갔던 세계적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참가자들을 격려하는 연대의 편지까지 보냈지만, 희망버스에 대한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목적은 사내하청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이행하지 않는 현대차 사측에 법원 명령을 조속히 이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지만, 폭력성에 대한 강조에 묻혀 정작 이 내용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잘못은 회사 측에 있는 것인데, 비난은 엉뚱한 이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쌍용차분향소 조문 (경향DB)
부당함을 제쳐두고라도, 이번 논란은 다시 한번 시위와 폭력에 대한 한국 사회의 결벽증을 확인시켜준다. 노동조합에 폭력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행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역대 정부는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치는 원인으로 ‘강성노조’를 지목하곤 했다. 여기에 어김없이 폭력적인 이미지가 중첩돼 제시되는 것은 다반사였다.
이런 선전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전에 취재를 위해 울산에 갔을 때, 몇몇 해고노동자들마저 자신들을 ‘선량한 노동자’라고 강변하면서 폭력적인 이미지와 선을 그었다. 시위가 있을 때마다 언론을 장식하는 그 무시무시한 ‘강성노조’는 어디에 있는지 자못 궁금하기까지 하다. 물론 폭력사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폭력은 시각적인 것이고,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벌어진 폭력을 부정하는 것은 그것을 부각시켜 대중을 선동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폭력 논란은 효과적으로 사건의 본질을 감춰버릴 수가 있다. 히틀러가 정치적 반대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 국회의사당 방화였다. 이 방화사건을 빌미로 히틀러는 국회를 해산시키고, 자신의 입맛대로 권력을 운용하기 위한 기틀을 놓을 수 있었다.
폭력의 스펙터클을 활용하는 것만큼 효과적으로 대중을 공포에 몰아넣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폭력은 파괴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이라고 반드시 옳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것이 부정성에 내포된 묘한 이중성이다. 자유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한 국민이 복종을 강요당하고 또 그대로 복종하는 한 그들은 잘하고 있다. 이 국민이 속박에서 벗어날 힘을 갖게 되고 그 속박을 떨쳐 버린다면 그들은 더 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은 그들로부터 자유를 빼앗아간 것과 똑같은 권리로 이것을 되찾는 것이므로 그들이 자유를 회복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되거나 아니면 애초에 그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아간 것이 부당한 일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루소가 여기에서 말하는 “국민이 속박에서 벗어날 힘”이야말로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정당한 폭력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자 루소조차 자유를 빼앗아가는 권력에 대한 국민의 폭력을 옳은 것이라고 못박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루소가 폭력 자체를 찬미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부당한 권력이 복종을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조건에서 거기에 대한 저항도 폭력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다.
노동계급의 폭력혁명을 예견했다는 마르크스도 이런 관점에서 폭력의 문제를 이야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년에 마르크스는 영국 의회정치의 개혁을 보고 자본주의가 반드시 폭력적으로 종식돼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수정하기도 했다. 이를 보더라도 군대나 경찰 같은 국가장치를 동원해 국민의 저항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폭력혁명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분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루소와 마르크스의 견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폭력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누구도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시위를 하지 않는다. 폭력의 스펙터클을 통해 대중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이들을 우리는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 테러리스트는 본질적으로 대중의 잠재력을 인정하지 않는 반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폭력은 실제로 비폭력이라는 이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비폭력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폭력이 발생하는 셈이다. 따라서 모든 폭력은 계획된 것이라기보다 우발적인 것이다. 폭력의 이상인 비폭력을 저항의 수단으로 실현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간디는 지젝의 말처럼 히틀러보다도 더 폭력적이라는 논리가 가능하다.
(경향DB)
과연 희망버스는 폭력의 스펙터클을 통해 대중을 겁박하고자 했던 것일까? 일부 언론보도만을 보면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그 폭력성을 비난하기 이전에 그 폭력이 왜 발생했는지 따져보는 성찰도 필요하다. 노동자도 국민이라면,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행위가 설령 폭력성을 띠더라도 그 책임은 그것을 유발한 권력의 부당성에 있는 것이지, 저항한 이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루소의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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