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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책 나누기 운동본부’의 M본부장을 만날 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곤 한다. 나보다 한참 손위의 그녀가 지난번엔 노랑머리 이번엔 빨간 머리, 팔색조처럼 매번 새로운 머리 모양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파격은 그뿐이 아니다. 격식을 갖추어 예식을 진행하고 단체사진을 찍을 때에도 검은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독특한 스타일이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독서운동을 벌이는 주 무대가 바로 병영이기 때문이다. 1999년부터 지금까지 문화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군부대에 독서운동을 전개하고 총 76개의 병영도서관을 개관한 그녀는 가장 군을 잘 알고 사랑하는 민간인이라 할 만하다.

“본부장님은 참 용감하신 것 같아요. 빨간 머리에 선글라스 차림으로 ‘별’들과 어깨를 겨루고 기념사진을 찍으시니….”

존경심과 의아함이 뒤섞인 내 말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나를 보고 좀 놀라라고요. 저런 사람도, 저런 세상도 있다는 걸 알라고요. 군대가 얼마나 폐쇄적인 조직인 줄 아세요? 조금이라도 군을 변화시키려면 이런 충격 요법이라도 써야 해요.”

한동안 병영문화 개선사업에 동참해 연천의 포병부대, 서산의 공군부대, 김포의 해병대에서 문학 강연을 하고, ‘국방일보’와 병영잡지에 칼럼도 연재했다. 처음엔 심신이 너무도 건강해 신검에서 1급을 받을 것이 불 보듯 훤한 내 아들을 위해 군이라는 낯선 조직과 조금이라도 친해보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를 통해 내가 만난 것은 ‘세상의 모든 아들’이었다.

한국인은 군인을 보는 관점에 따라 나이가 가늠된다. 군인이 아저씨로 보이면 어린이, 형이나 오빠로 보이면 청소년, 친구로 보이면 20대 초반, 동생으로 보이면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조카로 보이면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 그리고 40대 중반부터는 군인이 아이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민통선을 지척에 둔 전방부대에 도착해 내가 만난 군인들은 영락없는 ‘아이’였다. 덩치만 컸지 하는 짓은 어설프기 그지없어 엄마의 맘을 졸이게 하는 아들, 엄마 앞에서는 불퉁대지만 그 호기로운 반항의 이면에 바깥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숨긴 아들, 그런 내 아들과 꼭 닮은 ‘아이’들이 군복을 입고 무거운 전투 장구를 멘 채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때마침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따가운 햇살과 뽀얀 먼지 속에서 묵묵히 맡은 임무를 수행 중인 그들을 보노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문학 강연’에서 ‘문학’은 제쳐두고 내가 그들에게 당부한 말은 한마디였다.

“귀하디귀한 그대들이여, 어쩔 수 없는 어미의 심정으로 부탁하고 바라는 단 한 가지는 의무의 시간을 잘 보내고 부디 건강하게 무사히 돌아오라는 것뿐이다!”

신식 병영의 내무반 모습 (출처 : 경향DB)


그러하기에 나는 요즘 뉴스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마음이 아파 기사를 읽을 수도 없다. ‘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루’는 게 아니라 군에 보낸 아들 때문에 부모 형제가 밤잠을 설치는 지경이다. 그래도 요즘 군대는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던 게 무참하고, 그 와중에도 병영문화 개선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훌륭한 장병들의 사기도 걱정스럽다. 기실 문제는 구조적인 것이다. 병영문화잡지 ‘HIM’에서 병사 108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군 생활이 힘든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단체생활과 통제생활의 고달픔’이었다. 병영에서 집단적인 생활을 하며 경험하는 일상적인 갈등과 충돌이 필연적이라면, 그것이 외부와 통제된 상황에서 은폐되고 왜곡될 때 ‘사고’가 터진다. 그동안 성역이거나 금기였던 징병제에 대한 생산적인 고민과 더불어 군 조직의 폐쇄성에 대한 재고가 절실하다. 사단장이 퇴임하고 연대장이 바뀌면 애써 만든 도서관이 다시 창고가 되어버리는 일이 거듭되는 상황에서 빨간 머리의 충격요법이라도 쓰려는 M본부장의 분투가 새삼 이해된다.

닫힌 세계에서 아이들이 죽는다. 열린 세계를 두려워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죽인다. 가족이라는 밀실에서 학대당해 죽고, 세월호라는 밀실에 갇혀 수장당하고, 군대라는 밀실에서 살해당한다. 미래를 위해 아이를 낳으라고 캠페인을 벌이는 대신 현재의 아이들이나 죽이지 말고 지키라는 말이 입 끝에서 간질거린다. 아무러한 환난과 위기에도 7시간 동안 꼭꼭 숨어있을 만큼 안전한 밀실은 어드메 있는지 몰라도, 폐쇄된 밀실에 창을 내고 문을 만들어 열지 않으면 황망한 죽음의 행렬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닫히면, 갇힌다.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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