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컴퓨터를 켜면 펼쳐지는 바탕화면에는 복숭아를 향해 한껏 입을 벌린 아기 사진이 배경으로 떠 있다. 평생 할 효도의 90퍼센트 이상을 한다는 그 짧은 시간의 황홀하도록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싱그러운 과육 냄새와 팔뚝을 타고 흐르던 단물까지도 여전히 생생한데, 내 곁에는 사진 속의 천사 대신 오늘 아침에도 까닭 모를 짜증과 심술을 부리다가 기어코 현관문을 부서져라 닫고 등교해버린 여드름투성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놈이 가장 예뻤던 때를 추억하며 참아야 하니라 되뇌고 되뇌는, 나는 그 이름도 처연한 ‘고3 엄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뺨따귀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으로 3월 모의고사와 4월 모의고사를 치렀다. 등급 컷을 확인하고, 원점수와 표준점수와 전국 백분위를 구분하고, 대학들이 장기짝 옮기듯 바꿔 내놓는 입시전형을 톺아보는 동안 봄날이 갔다. 중간고사와 6월 모의고사가 끝났다. 마지막 ‘내신 사수’를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쉽게 출제하라”는 권력자의 한마디에 변별력마저 상실한 모의고사에 망연자실했다. 이러구러 기말고사와 7월 모의고사가 지나고 여름방학이다. 수시 원서에 들어갈 자기소개서와 씨름하는 한편 정시에 대비해 끝까지 수능 준비를 게을리할 수 없다. 무언가에 몰린 것도, 홀린 것도 같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학창 시절에도 시험기간의 긴장과 고독을 즐겼던 괴벽한 성미인지라 처음 해보는 ‘고3 엄마’ 노릇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하나, 내가 미처 몰랐던 문제가 있었다. 입시설명회를 쫓아다니고 보약을 지어대고 아이의 눈치를 보는 일보다 중요한 ‘고3 엄마’의 역할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입시설명회에 온 고3 학부모들 (출처 : 경향DB)


연초에 예상하기로 올해 수험생들의 가장 큰 ‘위기’는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가 아이들의 마음을 휘저었다. 대체 공부가 무슨 소용인가, 광장으로 달려 나가야 하지 않겠냐고 묻는 아이의 슬픔과 분노를 이해하는 일이 성적 관리보다 힘들었다. 중·고등과정을 사교육 없는 대안학교에서 보낸 아이가 악전고투로 입시를 준비하며 교육의 목적을 묻고 어른들의 위선을 성토할 때도 괴로웠다. 아이들은 시시때때로 흔들렸다. 그것이 바깥으로는 야금야금 일탈행동을 하거나 컴퓨터게임에 몰두하는 ‘현실도피’의 모습으로 나타날지언정, 결국 흔들림은 “왜 의미 없는 공부를 의무로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을 얻지 못한 마음의 문제였다.

그리하여 아이러니하게도, ‘고3 엄마’는 어느 때보다 ‘학부모’가 아닌 ‘부모’로 살아야 마땅하다. 공부를 하기 싫다면 대학을 가야 할 이유와 배움의 의미에서부터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토론해야 한다. 아들아이는 고민 끝에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그 대답에 내심 안도했던가. 빗대기에 열없지만 주자(朱子) 역시 과거 공부가 인간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음에도 자식들이 과거를 보는 것은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주자도 어쩔 수 없을 만큼 과거의 위력은 대단했으니.

부모의 모순을 인정해야 아이의 고민도 이해할 수 있다. 광장과 독서실 사이에서 방황할 때에는 끝까지 그의 판단에 개입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나 또한 1987년 그 뜨겁던 여름에 고3을 보내며 ‘유예된 삶’에 절망했던 경험이 있기에. 여름방학 전 마지막 모의고사를 치르고, 아이와 함께 단원고 2학년 3반 17번 박예슬의 전시회를 찾았다. 전시작의 많은 부분은 모작(模作)과 입시미술이었고, 그러하기에 더 안타깝고 가슴 아팠다. 박탈당한 것은 ‘재능’이라기보다 ‘일상’이다. 지극히 사소하고도 더없이 소중한. 아들아이는 한참을 말없이 영원히 고3이 될 수 없는 고2의 흔적을 바라보다가 돌아서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을 잊지 않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이십여 년 전에 겪고 다시 겪는 ‘고3’은 당황스럽고도 새삼스러운 시간이다. 현실이 적나라해지고, 욕망이 적나라해지고, 부모 자식의 관계가 적나라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고민과 대화가 깊어지는 마지막 기회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꼬박 석 달 남았다. 입시라는 기묘한 통과의례에 맞닥뜨린 모든 고3과 재수생과 N수생들의, 입시가 아닌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뛰어드는 용감한 친구들의, 그리고 다만 아이들을 ‘너무’ 사랑하기에 괴로운 동병상련의 ‘고3 엄마’들의 건투를 빈다.


김별아 | 소설가

'=====지난 칼럼===== > 낮은 목소리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실 살인’의 시대  (0) 2014.08.15
염치  (0) 2014.06.20
독재자의 자식들  (0) 2014.05.23
살아서는 읽을 수 없는 책  (0) 2014.04.04
올빼미와 개,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  (0) 2014.03.14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