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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성장하는 자식에게 일종의 ‘허들’과 같다. 삶이라는 장애물 경주에서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허들이기에, 그것을 어떻게 뛰어넘느냐에 따라 완주하느냐 포기하느냐가 결정되고 기록이 달라지기도 한다. 부모의 낮은 허들을 가뜬히 뛰어넘고서야 세상의 높은 허들에 두려움 없이 도전할 수 있다. 지배와 통제를 포기한 낮은 허들이 자아존중감과 용기를 키워주기 때문이다. 반면 부모가 너무 높은 허들이 되어버리면 멈칫댈 수밖에 없다. 심지어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부모가 성취한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자식의 비극이다. 그래서 조선조의 어느 현명한 아버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정승 자리에 오를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판서에서 행보를 멈췄다고 한다. 자신이 벼슬아치로서 닿을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면 자식이 도전할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모가 낮은 허들은커녕 높은 허들조차 아니고, 아예 두꺼운 벽이라면 어쩔 것인가? <독재자의 자식들>이라는 짐짓 자극적인 제목의 책은 이런 의문에 대한 씁쓸한 답을 담고 있다. 얼마 전 아들아이와 마주앉아 “악인들의 자식들은 왜 그리도 효자, 효녀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 식탁에 펼쳐진 신문에는 사학비리로 구속되었던 옛 이사장의 아들이 20년 만에 새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비리재단의 대학에 화려하게 컴백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제법 머리가 굵었다고 시시때때로 대립각을 세워온 아들과 오랜만에 한목소리로 침을 튀겼다. 왜 악인의 자식들은 부모의 악행을 답습하는가? 어떻게 반항 한번 하지 않고 부모의 가치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들의 가족을 그토록 화목하게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력세습 후계자 김정은이 열병식을 지켜보며 주석단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출처: AP연합뉴스)


기실 답은 간단하다. 그들의 가족은 식구로 통칭되는 밥상공동체를 넘어서 ‘이익집단’에 가깝다. 그들을 결합시키는 이해관계는 ‘돈’이다. 돈의 철학, 돈의 힘이 ‘가족애’의 원천인 셈이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독재자’로 분류되는 이들의 자식들에게는 돈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가 작용한다. 아버지를 부정해도, 설령 긍정한다 해도 그들은 결국 아버지의 그늘에 갇혀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 스탈린의 아들 야코프는 전쟁 중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히자 전류가 흐르는 철책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자살이라기보다 ‘살해’에 가까운 이유는, 전쟁 전 유대인 약혼녀와의 결혼을 반대한 아버지와의 불화로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을 때, 아버지로부터 ‘총 하나 제대로 쏘지 못한다’며 힐책당한 사실에서 비롯된다. 불명예스러운 포로가 되어버린 그는 돌아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카스트로의 딸 알리나는 서방세계에 아버지의 만행을 폭로한 활동으로 유명하지만, 인터뷰나 연설을 시작할 때마다 “저는 피델 카스트로의 딸입니다”라고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 모델이자 방송인이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그는 끝내 독립된 개인일 수 없었던 것이다.

‘독재자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망령에 영혼을 사로잡힌 채, 일생을 통틀어 아버지의 권력으로부터 얻은 특혜보다 훨씬 중요하고 많은 것을 잃는다. 아비가 도살의 피 묻은 손으로 뺨을 어루만질 때 사랑스럽게 방긋 웃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무지하고 처절하게 무감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실로 마음 바탕이 황폐한 그들에게는 끈질긴 치료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절대권력은 무오류하거나 절대악이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라는 도식 때문에, 도도하고 의연한 허수아비로 추종받을지언정 이해받고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현대의 공주와 왕자는 개인의 불행이요, 사회의 재앙일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 문학의 핵심 키워드이자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최초의 범죄는 ‘살부(殺父)’다. 이것은 패륜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통과의례와 자아의 독립을 뜻한다. 내 마음속의 거대한 아버지, 압도적인 아버지,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영웅이자 망령인 아버지를 지워야만 오롯한 나의 삶,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장애물 경주에서 부모라는 허들을 뛰어넘으면 그 결승점에는 부모보다 더 나은 삶, 전(前) 세대의 오류를 극복한 세계가 자리한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올라라!”라고 일갈했던 것도 스스로를 낮추어 다음 세대를 높이고자 했던 애정의 표현이었다. 사랑하면 낮아져야 한다. 높으면 기어올라서라도 넘어야 한다. 그 필사적이고 필수적인 과정이 없다면, 끝끝내 당당한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영원히 겁먹은 어린아이로 살 수밖에 없으리라.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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