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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의 선진이신 극작가 신봉승 선생을 만나 점심을 먹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이 대표작인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을 집필할 당시 부족한 자료를 구하기 위해 가장 많이 찾은 곳은 다름 아닌 남산 도서관 ‘앞’이었다고 한다. 드라마가 방영된 기간은 1983년부터 1990년까지인데, 1968년에 시작된 <조선왕조실록> 국역 간행 작업은 1993년에야 끝났기 때문이다. 1991년에 북한이 먼저 완역을 마치자 경쟁심에 불타오른 남한 정부가 급히 작업을 재촉한 터라 오역이 많았다는 뒷이야기는 제쳐 두고, 아무튼 자료를 해독하는 데 난항을 겪던 선생은 시시때때로 <조선왕조실록>을 품은 채 남산 비탈을 뛰어올랐단다. 도서관 ‘안’에서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가 도서관 ‘앞’에서 풀렸다. 남산 도서관 앞 나무그늘 아래서 바둑을 두고 계시던 흰 수염 훨훨 날리던 노옹들이 바로 그 해결사들이었다. 어려서부터 ‘네이티브(native)’로 한학을 익힌 노옹들은 선생이 내민 자료를 담배 몇 갑과 탁주 몇 사발에 척척 풀어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그 학 같고 신선 같던 ‘마지막 유학(幼學)’들은 더 이상 만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봉사 단청 구경하는 꼴로 까만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인 <승정원일기>를 노려보고 있다. 어쨌거나 국문학을 전공한 처지에 영어 원서보다 한문본을 읽기가 더 어려우니 민망하고 한심한 일이다. 혼자 꿍꿍대다 결국 출판사에 도움을 청해 한문학 전공자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또 며칠을 고스란히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 또한 역사 연구자들이 시달리는 ‘자료의 가난’을 체험하게 되었다. 전란과 식민 통치의 신산한 역사는 시대의 소중한 기록을 불태우고 흩어놓았다. 우리나라에 <사송유취> 한 종밖에 남아있지 않은 조선 전기 소송법서들은 임진왜란 시기에 강탈당해 일본 도쿄, 쓰쿠바, 나고야의 도서관에 다수 소장되어 있다. 고대사학자들을 고심하게 하는 <화랑세기> 필사본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본 궁내성 도서관을 뒤져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름만 전해지던 기록물들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은 행운과 같은 우연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조선의 금지된 소설 <설공찬전>은 이문건의 일기책 <묵재일기>의 안쪽 면에 숨겨져 있다가 500년 만인 1996년 발견되었고, 18세기와 19세기 무신들의 생활사를 밝힌 <노상추일기>는 안강노씨 문중에서 국사편찬위원회에 자료를 제공해 2006년에 간행되었다. 사료, 그중에서도 서책이나 문서가 발견되면 많은 수수께끼들이 풀리고 또 다른 수수께끼들이 새로이 제기된다. 그것을 역사가들이 연구한다. 그리고 그들의 귀한 연구를 자료 삼아 소설,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이 창작된다.

전산화되어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여전히 톺아볼 구석이 많은 이야기의 보물창고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풍부한 사료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헤아려볼 수 없는 상황이 속상하기 그지없다. 1623년 인조 1년부터 1910년 순종 4년까지의 기록이 현존하는 <승정원일기>는 3242책, 2억4250만자에 달하는 단일 사료로서는 가장 방대한 기록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국역된 부분은 고종과 인조 재위기, 그리고 영조 즉위년까지에 불과하다. 여태껏 해온 바대로의 인력과 예산이라면 대략 98년이 지나야 마무리되는 셈이다. 그러니 <승정원일기>는 내가 살아서 끝내 읽을 수 없는 책이다. 한류니 문화콘텐츠니 하여 그것을 써먹을(다시 말하면 ‘팔아먹을’)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부에서 뒤늦게 “예산을 줄 테니 10년 안에 끝내라”고 설레발을 쳤던 모양인데, 문제는 그동안 제대로 된 고전번역가를 키우는 데 아무런 투자도 관심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전문인력이 없는데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리가 있는가? 씨 뿌리고 물 한 번 주지 않으면서 과실 따먹을 궁리나 하는 꼴이다.

그 잘난 한식세계화 사업의 예산이 241억원이었다. 강을 살리기 위해 일단 죽여 버린 4대강 사업의 유지비용은 적게는 연간 6000억원에서 많게는 1조원, 심지어 2조원 이상까지 예상된다. 이미 때려먹은 헛돈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조선왕조실록> 영어 번역 사업이니 뭐니 하며 허튼짓을 하는 데는 두 발 두 손을 다 들겠다.

얕은 물에서 큰 고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역사는 가없이 깊은 물이다. 내가 살아생전 볼 수 없는 책을 언젠가 누군가 귀히 긴히 읽어주길, 그저 이리 맥없이 간절히 빌 뿐이다.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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