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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모어에 의하면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의 취침시간은 8시간이다. 그 정도의 잠이라야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삶이라는 축제를 가장 빛나게” 해줄 수 있고, 그런 단잠 속에서라야 찰스 디킨스가 읊조린 “부자와 거지를 계급에 관계없이 하나로 묶어주는” 꿈을 꿀 수가 있다. 식욕 그리고 성욕과 함께 수면욕은 인간의 3대 본능 중 하나다. 비록 그 때문에 인생의 3분의 1을 ‘낭비’한다고 투덜대는 악바리들이 없진 않지만, 달콤한 잠만큼 좋은 휴식은 없다.

그런데, 여기 잠 때문에 일터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있다. 2011년 5월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유성기업 아산공장의 투쟁은 밤잠을 좀 제대로 자자는, 지극히 소박하면서도 절박한 요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올빼미’로 살았다. 혹독한 야간노동은 평균수명을 단축하는 미래의 위협을 넘어서 당장의 목숨을 앗아갔다. 밤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통근버스 안에서 수마에 사로잡힌 듯 죽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끌고 집에 돌아가 잠에 곯아떨어진 채 죽었다. 수면 부족과 피로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에 걸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9년에서 2011년까지, 그렇게 돌연사와 자살로 세상을 등진 노동자들만 일곱 명이었고, 현장의 산재사고 또한 부지기수였다.

용의자 혹은 피의자에게 잠을 안 재우고 밤샘 조사를 계속하는 것은 고전적인 고문 방법 중 하나다. 인간은 사흘 이상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 뉴런이 재생되지 못해 뇌기능이 떨어지고 결국 사망한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기 전에 눈알이 빠질 듯하고 입안이 헤어지는 극심한 고통 속에 이미 정신이 너덜너덜해져 미쳐버린다. 그러니 죄 없는 동료들의 억울한 죽음 앞에 노동조합이 회사 측에 요구한 야간노동 철폐와 주간연속 2교대제는 노동자로서의 권리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권리였다.

유성기업 고공농성장 (출처 :경향DB)


유성기업은 현재 자동차 부품 가공 분야에서 국내 1위 회사라고 한다. 아산공장, 영동공장, 대구공장, 남동공장에 이어 중국공장을 두고 있으며, 국내 계열사만 7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처럼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귀족 노동자’들이 자부심을 갖기는커녕 배부른 투쟁, 아니 투정을 하는 데 대해 회사 측은 직장폐쇄와 용역깡패의 테러, 어용노조를 통한 분열공작으로 맞섰다. 그런데 무슨 귀족이 깡패들의 대포차에 속수무책으로 치이나? 무자비한 폭력에 두개골이 함몰되고, 갈비뼈가 부서지고, 콧등이 주저앉나? 비닐하우스와 천막과 굴다리에서 풍찬노숙을 하나? 더더군다나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은, ‘올빼미’가 기어이 ‘개’가 되어버린 이야기이다.

초기에 법원의 중재로 폐쇄되었던 직장에 복귀했을 때, 노조원들은 회사 정문 앞에서 “나는 개다!”를 3번 복창해야 용역들이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고 한다. 차마 듣는 귀를 의심하게 하는 ‘개 같은’ 이야기다. 이런 사연을 듣고서야 나는 비로소 홍종인 유성기업 아산공장 지회장과 이정훈 영동공장 지회장이 경부고속도로 옥천나들목 옆 광고탑에 오른 진짜 이유를 알았다. 바람만 불어도 멀미가 난다는 그 어지럽고 뜨거운 자리에서 그들이 기어이 세상과 싸우는 바보를 자청한 까닭은 바로 ‘올빼미’도 ‘개’도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청문회와 국정감사를 통해 부당노동행위가 만천하에 드러나 고용노동부에 고발까지 당했음에도 일말의 반성도 수치심도 없는 사측에 ‘사람’으로서 맞서기 위함이다.

살다 보면 치사하고 더러운 일을 수없이 겪게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꺾이거나 구부러질 때도 있다. 때로 비굴하게 타협하기도 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임상수 감독의 영화 <돈의 맛>에 나오는 것처럼, ‘모욕’은 마지막 뇌관이다. 문제는 다만 그것을 느끼느냐 느끼지 못하느냐, 견디느냐 견디지 못하느냐 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 전국 30여곳에서 ‘희망버스’가 그들을 향해 출발한다. ‘올빼미’와 ‘개’는 모욕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마땅히 능멸을 견딘다. 하지만 ‘사람’은 모욕에 맞서 싸운다. 시민들의 자발적 연대, 새로운 사회운동의 등장을 의미하는 희망버스가 응원하는 대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고립된 약자들의 자살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척박한 세상에서,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을 품을 수 있고 희망을 전할 수 있다고 외치며 떠난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상 22미터 높이에서 ‘사람’으로 실존할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희망버스의 엔진 소리만큼 아름다운 응원가는 다시없을 것이다. ‘사람’만이 ‘사람’을 위해 노래할 수 있으리니.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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