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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말레이시아를 방문했을 때였다. 쿠알라룸푸르 중심가에 있는 차이나타운을 구경하는데, 지나가는 여행객들에게 호객꾼이 ‘가짜’ 명품시계를 팔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사지 않겠다고 피하는 나를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귀찮긴 했지만, 사라고 들이대는 논리가 재미있었다. “이 시계는 진짜와 다를 게 없는 가짜 시계다.” 진짜와 같은 가짜 시계는 진짜일까, 가짜일까.

한국의 경우도 가짜 명품을 제조해서 팔다가 적발되었다는 보도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가 있다. 어떤 불법 제조업자는 실제로 명품가방 위탁업체에 근무하다가 퇴직한 뒤에 계속 가짜 명품가방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식 직원으로 만든 가방과 그렇지 않을 때 만든 가방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처럼 동일한 재료와 기술을 사용해서 전문가도 구별하기 어렵다면 그 가방은 과연 진짜일까, 가짜일까.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을 맞이해서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국정목표를 제시했다. 정부가 개설한 국무조정실 홈페이지에 가보면 이 국정목표를 친절하게 해설해놓고 있다.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내용에 따르면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것은 “과거로부터 지속되어온 잘못된 관행과 비리, 부정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추진하는 정부의 개혁 작업”이다. 이 표현에 따르면 비정상적인 것은 ‘잘못된 관행과 비리’, 그리고 ‘부정부패’이다.

부정부패 척결은 비교적 모호하지 않지만, ‘잘못된 관행과 비리’라는 말은 지시대상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잘못’이라는 수사이다. 분명히 ‘잘못’은 비정상적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가짜 명품이 문제되는 것은 그것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잘못’된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법을 어겼기 때문에 ‘잘못’이다. 질서를 지키는 것이 법이라고 할 때, 이 법을 통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정상적인 상표의 사용권이다. 명품 상표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지키는 것이 이를테면 정상적인 것이다.

 

(경향DB)

그런데 이야기했듯이, 진짜 명품을 만드는 방식 그대로 같은 기술자가 제품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과연 명품인가. 당연히 그 제품은 품질의 측면에서 본다면 명품일 것이다. 그러나 법은 그것을 명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명품 본사의 허가 없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두 가지를 말해준다.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상품은 아무리 명품이라 할지라도 제품 자체에 가치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하나고, 법이라는 것은 품질과 관계없이 상품의 가치를 규정하는 외부적 요인을 수호한다는 사실이 둘이다.

이 외부적 요인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시장 질서라고 불리는 사고파는 교환의 수월성일 것이다. 모든 것을 만들어 팔 수는 있지만, 이미 선점된 것을 무단으로 가져다 팔 수는 없다.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한다. 허락 받지 않고 제 마음대로 하려는 ‘잘못된 관행과 비리’는 단호한 법 집행을 통해 척결해야 한다. 가짜가 판을 치면 진짜가 발을 붙이기 어려우니까, 가짜를 없애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자명한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문제는 이 자명한 사실을 자명하게 만드는 근거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비정상의 정상화’에서 핵심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보통 정상화라는 것은 근대성의 문제에서 중요한 쟁점이었다. 근대라는 것은 정상적인 것을 규정함으로써 비정상적인 것을 배제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임상의학의 경우도 남성의 몸을 정상성으로 설정하고 여성의 몸을 거기에 맞춰 인식하는 식이었다. 서구의 문화론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문화를 정상적인 것으로 표준화함으로써 비유럽 문화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서구의 보수는 대체로 정상성에 대한 논의를 우선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는 반대로 비정상적인 것을 먼저 지목하고 나오는 것 같아서 이상하다. 비정상적인 것을 먼저 정하면, 정상적인 것은 자동으로 결정된다는 투이다. 정상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비정상적인 것만 주목하는 강박증마저 있는 것 같다. 제대로 하려면, 자신들의 정상성부터 사회적인 합의를 얻는 게 맞다. 40%의 지지만을 그 정상성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이다.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은 ‘대통합’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당연히 보수의 의미에서 정상성은 ‘대통합’을 전제해야 가능한 것이다. 정상성은 합의의 문제이고,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어야 가능한 것이다.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화한다는 원칙에 대해 반대할 이들은 없다. 이 원칙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비정상과 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무엇이 정상적인 것인지 논의하는 것이 먼저다. 이 논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당사자가 언론일 텐데, 진정으로 지금 이런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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