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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을 달고 게시판에 나붙은 한 대학생의 대자보가 파장을 일으킨 몇 주였다. 각계각층에서 “안녕하지 못하다”는 호소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급기야 대자보는 국회 게시판까지 이르렀고, 김무성 의원마저 손글씨 대자보를 붙이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정색하고 말하자면, 대학에서 시작해 퍼져나간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이 최종 지점으로 국회에 도달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순식간에 지나간 과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중정치에서 대의정치로 수렴되는 ‘안정화’를 대원칙으로 삼는 정치철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민주주의는 바람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인정하고 나면 무엇인가 찜찜하다. 이 열풍이 ‘대선불복’이나 ‘정권퇴진’까지 나아가 주기를 바라는 이들 입장에서 본다면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기만 하는 대자보는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고, 그에 대한 응답은 과거 2002년 이래로 항상 그렇듯, ‘촛불’이라는 ‘참여’로 구체화되어 나타났을 것이다. 이 ‘촛불’의 자매품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입금’이 있기도 하지만, 이른바 진보세력이라는 이들에게 ‘참여’의 의미는 최소한 시청 앞에 모여서 ‘촛불’이라도 밝히는 것인 셈이다.

‘촛불’과 ‘입금’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둘은 연대와 지지를 표명한다는 점에서 시민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행동’이자 ‘참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시민운동이 연대와 지지의 차원에 머물게 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과거의 경험은 충분히 제시해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2002년의 오마주처럼 거론되었던 2008년 ‘촛불’은 취임 6개월도 되지 않았던 대통령의 지지율을 20%대로 떨어뜨리는 위력을 발휘했지만, 그 결과는 박근혜 정부라는 보수정권의 재창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최다 득표율을 기록했음에도,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광범위한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때문에 야권이 석패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진보세력에게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전모를 보면, SNS의 여론형성 기능에 더 주목했던 당사자는 보수세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진단들이 동의하듯이, 지난 대선은 ‘부동층’의 향배에 따라 승패가 갈렸다. 이 ‘부동층’은 기성 정치세력, 또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이들이기도 했다. 지난해 치러졌던 두 번의 선거에서 핵심 화두가 ‘혁신’이었던 이유이다. 돌이켜보면, 보수세력을 궁지에 몰았던 가장 무서운 위협은 아마도 ‘안철수 현상’이었을 것이다. 진보세력은 이 ‘안철수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바람을 탔어야 하지만, 오히려 안철수라는 개인에 대한 경계심 내지 적개심이 너무 컸던 탓에 현상을 불러일으킨 근본적인 대중정치를 받아안지 못했다.

 

안녕들 하십니까? (경향DB)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은 2000년대 이래로 한국을 지배해왔던 자기계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전면적인 성찰이기도 하다. 자기계발의 논리는 ‘탁월한 자기’를 완성함으로써 행복을 도모할 수 있다는 고대 인생론의 현대 판본이다. 그러나 이 인생론은 더 이상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가 없다. 지금 젊은 세대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지난해 유럽에서 불붙었던 “분노하라” 운동에 준하는 현상이라고 할 만하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 현상을 지속시키는 것일 테다.

‘안철수 현상’은 안철수라는 상징적 개인에게 의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했다. 그러나 ‘안철수 현상’에서 안철수를 지워버린다고 해도 그 본질이 사라질 수 없듯이,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도 대자보를 없애버린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이 바람은 근본적으로 ‘안철수 현상’과 같은 원인에서 시작된 것이다. 안녕하지 못한 개인의 공백이 국가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이 현상의 본질이다. 문제는 이 질문을 받아서 국가의 재구성으로 나아가는 것이겠지만, 이 지점에서 투표 이외에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목격한 진보세력의 난관이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발전시켜서 ‘공공성의 재사유’라는 화두를 끄집어냈다.

지금 “안녕들 하십니까” 현상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어떤 ‘성노동자’의 대자보이다. 이 불편한 진실의 출현에 대한 논란이 SNS를 오르내리고 있다. 이 논란이 건드리고 있는 것은 ‘공공성’과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공공성’이라는 것이 너도나도 자신의 의견을 제출하는 공론 자체라고 한다면, 더 많은 ‘잡종’에게 개방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여기에서 의제는 ‘공공성’이라기보다 이것을 유지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 공공성을 보장하는 민주주의야말로 우리가 끊임없이 확장해야 하는 정치의 목적이 아닐까.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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