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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0월13일 중국 상하이 YMCA에서 의미심장한 강좌가 열렸다. 강사는 옌푸라는 정치평론가이자 번역가였고, 주제는 정치학이었다. 옌푸는 최초로 영국 유학길에 올랐던 중국학자로 토머스 헉슬리나 허버트 스펜서의 저서들을 중국어로 번역해서 이름을 얻었다.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그가 번역한 19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서들은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 반향을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천연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는 사회진화론을 아시아의 정신세계로 도입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당시 중국 지식인들은 두 전쟁에서 드러난 일본의 군사력을 ‘국가발전’의 증표로 생각했다. 일본이 일찍이 서양처럼 입헌국가를 설립했기에 러시아와 중국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국가발전의 단계를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설명한 스펜서의 영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영향은 중국 지식인들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동시대 아시아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최근 한국어로도 번역된 옌푸의 <정치강의>는 정치학을 국가의 문제에 대한 학문이라고 소개하면서 국가를 유기체에 비유한 사회진화론의 입장을 적극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사회진화론을 진지한 학문으로 생각하는 학자들은 없다. 사회진화론이 무단으로 차용한 다윈조차도 자신의 적자생존론을 사회문화해석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이제 학계에서 사회진화론은 자연과 사회를 동일한 법칙으로 설명했던 속류 유물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사회진화론이 먼저 번역되고 읽힌 뒤에 다윈의 저서들이 수입됐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오히려 다윈이 사회진화론의 관점으로 이해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런 까닭에 옌푸도 세상을 떠난 지 오래고, 사회진화론도 더 이상 과학적인 사회이론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지만, 아직도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그 사회문화적인 영향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판단이다. 1900년경에 중국을 통해 근대의 정치이론을 수입했던 한국에서도 사회진화론의 흔적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진보의 문제를 진화론적으로 사고하는 지식담론의 경우가 그렇다. 한국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선진국에 빗대 즐겨 얘기하는 태도에 한번쯤 사회진화론적 태도가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역사발전을 진화론적으로 사고하면서 우승열패의 관점에 입각해 선진국과 후진국을 구분하고 전자를 강자로 인식하는 것이 왜 문제일까. 가장 심각한 것은 이런 사고방식을 통해 유기체적인 국가라는 재현에서 배제되는 것들을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는 행위이다.

찰스 다윈과 이광수 (출처: 경향DB)


이 외에도 우리가 세계를 사유하는 방식에 깔려 있는 사회진화론의 흔적이 잘 드러나는 사례 중 하나가 스포츠다. 독일의 나치도 그랬듯이, 스포츠는 민족국가의 단일성과 우월성을 과시하는 효과적인 상징 행위이다. 그러나 얼마 전 소치올림픽을 통해 불거진 ‘빅토르안’이나 김연아 판정을 놓고 벌어진 논란은 약간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이 논란에서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국가 또는 집단에 대한 비판이다. 분명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 변화의 실체는 무엇일까.

사회진화론적인 사고는 신자유주의와 만나면서 사회선택론으로 변형되기도 했다. 자기계발의 논리도 이런 사회선택론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사회선택론은 자연선택론에서 자연의 범주를 사회로 대체한 이론에 불과하다. 게다가 여기에서 전제하는 사회라는 것은 시장 네트워크를 말할 뿐이다. 사회진화론이 국가에 초점을 맞춘다면, 사회선택론은 평등하게 교환가치로 연결돼 있는 네트워크에 중점을 둔다. 이 네트워크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 이를테면 ‘적자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다. 당연히 국가는 퇴거하고 경제적으로 자기이해관계에 충실한 독립적인 개인이 인격적 요체로 부상하게 된다. 이런 자율적 개인의 관점과 경쟁 관계에 있는 공동체주의적인 경제개념이 유독 한국에서 크게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도 이렇게 사회선택론으로 이행한 사회진화론의 영향 때문이 아닌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렇게 국가에서 개인으로 이데올로기의 중심이 이동한 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집단은 내부적 균열로 인해 결과적으로 개인으로 쪼개진다. 이 쪼개진 개인이야말로 정치적 가능성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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