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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관용구 중에 “남부끄러워 못살겠다”거나, “남보란 듯이 잘 살아주겠다”는 표현이 있다. 나라에 불행한 일이 생기면 “국가적 망신이다”라고 여기기도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저 모든 문장들에는 우리를 지켜보는 외부의 시선이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그 시선이 우리를 판단하거나 평가할 자격이 있다고 느끼고, 그 시선에 의해 우리의 가치가 좌우된다는 믿음이 들어 있다. 심지어 그 시선이 우리보다 강하고 선하다고 느끼는 무의식까지 있다. 그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한 사건을 해결하고 그 경험에서 소중한 지혜를 배우는 일에 무능하다. 그들은 하루 빨리 사건을 덮어두고, 문제가 없는 듯한 겉모습을 꾸미고, 남들 눈에 그럴듯하게 보이는 치장에 집중한다. 그런 태도는 자신이 열등한 존재라는 무의식에 갇히는 결과가 되며 병적인 수치심과 죄책감 속에 머물러 있도록 만든다. 물론 불행한 사고가 끊이지 않는 원인이기도 하다.

최근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에 대해 우리는 슬픔과 분노의 감정과 함께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껴왔다. 슬픔과 분노가 진정되면서 죄책감과 수치심이 한결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나친 죄책감을 떠안은 이들은 거듭 “미안하다, 우리 모두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수치심을 경험하는 이들은 “국치(國恥)라거나,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믿을 수 없어. 어쩌자고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불행한 사건과 우리가 인식하는 나르시시즘적 국가 이미지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감정이 죄책감이다. 수치심은 자신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는 일을 말한다. 우리가 자주 쓰는 관용구 “남세스럽다”는 수치심을 전제로 하는 언어이다. 죄책감도 수치심도 실은 “우리가 괜찮지 않다”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결과이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이 그러하듯 죄책감과 수치심에도 건강한 단계와 병리적 단계가 있다. 건강한 죄책감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며, 실수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을 뿐 자기가 사악한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 감정이다. 병리적 죄책감은 자신이 절대로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으며, 자신이 완벽하고 선하다고 여기며, 그래서 세상의 기본적인 규칙들을 위반하기도 하는 마음이다. 건강한 수치심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감정이다. 자신이 유한한 존재이며 잘못을 범할 수 있으며, 실수를 통해 개선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병리적 수치심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선하지 않고 잘못되어 있다고 여기는 마음이다. 자신과 타인을 함부로 판단 평가하면서 모든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지나친 도덕주의를 낳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과도한 수치심과 죄책감을 추진력으로 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으며 겉보기에 유능하고 자신만만하며 확신에 차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일수록 내면에서는 정반대의 감정을 경험하고 있기 십상이다. 자주 열등감, 소외감, 공허감 등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성취에 대해 회의를 느낀다. 그들은 성장기에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받은 게 아니라 그들이 성취한 것으로 사랑받은 이들이다. 부모 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을 때, 학업 성적이 좋았을 때, 대회에서 상을 받았을 때만 사랑받은 경험이 그들을 성취 지향적으로 만들었다. 잘못을 야단칠 때 아이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는 부모, 실수를 비판하면서 수치심과 모욕감을 함께 준 교육 환경도 그들을 만드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성공한 사람은 실은 비난, 수치심, 죄책감에 발꿈치가 물릴까봐 맹렬히 달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멋진 모습을 꾸며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랑이나 존중감을 얻을 수는 없다. 그 사실이 다시 그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건강한 자기애나 자기 존중감은 외부에서 얻는 게 아니라 내면에서 만들어 가지는 자질이라는 것을 그들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더 큰 리더십과 공동체 의식, 역사의식을 기대한다. 하지만 그런 이들일수록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특성을 보이는 점에 거듭 실망하곤 한다. 사실 그들의 성공 비밀이 개인적 결핍감이나 수치심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건강한 자기 존중감을 회복해야 바로잡을 수 있어
실수·실패 통해 더 나은 존재 될 수 있다는 믿음 필요


지금 우리 사회는 성공한 사람이 경험하는 공허한 내면 같은 정서에 물들어 있는 듯 보인다. 그동안은 스스로를 “괜찮다”고 여기는 나르시시즘을 추진력으로 하여 달려왔다. 간혹 우리는 한두 명의 스포츠 스타가 이룬 성취를 마치 국가적 성공처럼 여기기도 했다. 단지 축구에서 이겼을 뿐인데 마치 우리나라가 세계를 제패한 것처럼 도취되기도 했다. 세계 일류를 꿈꾸며 가장 크고 높고 빠르고 강한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면서 그 사실을 다시 추진력으로 삼았다. 우리의 내면이 나약해서 병리적일지라도 나르시시즘적 추진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뒷면을 직시해야 할 때가 되었다. 술 소비량, 자살률, 이혼율, 교통사고 사망자 수, 명품 소비량, 악플의 나라 등 객관적으로 우리가 “괜찮지 않다”는 지표들을 바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불편해 하는 사회현상들이 곧 성공한 사람이 드러내는 반전 실망과 같은 차원의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동안 “괜찮다”는 사실에만 매달렸던 이유도 실은 병적인 수치심과 열등감을 내면 깊숙이 억압해 놓은 까닭이었다.

병리적 죄책감이나 수치심은 건강한 자기 존중감을 회복해야 바로잡을 수 있다. 자기 존중감은 이상화시키고 미화시켜둔 자기 이미지를 벗어낼 때 만들어 가질 수 있다. 자기가 부끄러운 일, 잘못된 일을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일이다. 부족한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소중하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며, 실수와 실패를 통해 배워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듯 건강한 수치심과 죄책감을 경험하는 일이다. 부끄럽고 미안해서 죽을 것 같은 마음을 안은 채 살아가는 일이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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