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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는 정말 방대한 주제를 건드리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자료가 허다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한화춘정변증설(漢화春情辨證說)>, <화동기원변증설(華東妓源辨證說)>은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동양의 포르노그래피 곧 춘화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담고 있다. 전자는 남녀의 성행위 조각상인 ‘춘의(春意)’가 인조 때 처음 조선에 수입되었다는 사실, 후자는 북경에서 수입된 춘화를 사대부들이 즐겨 감상한다는 사실 등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리학에 기반을 둬 윤리를 제일의적 가치로 삼았던 조선 사족사회의 이면(아니 지배계급의 리얼리티)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조선 지식인들이 접했을 가장 노골적인 소설인 <금병매>의 수입에 관한 자료도 이 책의 <소설변증설>이 유일하다. 약간 소개하자면 왕세정(王世貞)이 <금병매>의 작가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무근이라는 것, 그리고 조선에는 영조 을미년(영조11, 1775)에 영성부위(永城副尉) 신수(申綏)가 역관 이심(李諶)에게 북경에 가는 길에 은 1냥을 주어 사오게 했다고 하는 것도 <소설변증설>에만 보이는 것이다.

부위는 원래 군주(郡主)의 남편으로 의빈부의 정3품 벼슬이다. 군주는 왕세자와 정실 사이에서 난 딸이니, 결국 임금의 사위쯤 된다. 이 사람들은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이럭저럭 세월을 보내는 수가 많은 법이니, <금병매>의 소문을 듣고 구입하게 한 것도 대충 짐작할 만한 일이다. 신수가 구입한 <금병매>는 어떤 판본인지는 모르지만 20책이고 판각이 아주 정교했다고 한다.

<금병매>는 사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로 워낙 유명한 소설이다. 나 역시 읽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일에 쫓겨 읽을 짬을 내지 못하였다. 시간이 잔뜩 흘러 대학에 자리를 잡고 난 뒤 1993년인가 청년사 간행본으로 이 책의 서두를 읽다가 바쁜 일로 덮고 말았다. 뒤에 2003년에 안식년을 처음 얻었을 때 비로소 이 책을 완독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도판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는 남녀의 성행위를 그대로 묘사한 것이 적지 않았다. 아마도 조선후기의 독자들 역시 이 도판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최음제와 섹스토이와 같은 것들도 있고, 동성애까지도 등장한다. 그러니 이 책은 골방에서는 열렬한(?) 애독의 대상이 되었겠지만, 공식적인 비평의 자리에서는 결코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소설변증설>은 비판적인 평가로 청(淸)의 지식인 신함광(申涵光·1619~1677)이 말을 인용하고 있다. 신함광은 세상 사람들이 <금병매>가 인정(人情)을 잘 묘사한 것이 사마천의 <사기>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차라리 <사기>를 읽지 왜 <금병매>를 읽느냐는 것이다. 신광함을 만날 수 있다면, 한 마디 하고 싶다. “그걸 몰라서 묻느냐?” <금병매>는 도덕군자들에게 음란한 소설로 비난을 받았지만, 그렇다 해서 수준 낮은 포르노소설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사대기서에 끼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소설이야말로 명대 지배계급의 타락상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수준 높은 사회소설이다. 신체적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이처럼 진솔하게 드러낸 작품도 없을 것이다.

<금병매>를 읽으면서 한국에 성을 주제로 삼거나, 아니면 제재로 삼는 서사물이 없는지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은 없다. 물론 아주 없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다.

<촌담해이>,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어면순(禦眠楯)>, <어수신화(禦睡新話)> 등의 성을 제재로 삼은 짧은 서사물, 곧 색담(色談)들은 다수 있다. 다만 이 색담들은 대개 사람들 사이에서 구비전승되던 것들을 모은 것인데, 성의 문제를 정색을 하고 정면에서 다룬 것은 아니다. <금병매>와 같은 심각한 비판의식을 내장한 장편의 서사물이 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물론 이 텍스트들은 다른 차원, 곧 조선조 사람의 성풍속과 성의식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몇 해 전 성균관대학교 안대회 교수가 <북상기(北廂記)>란 한문 희곡 한 편을 번역해 출판했는데, 상당히 ‘음란’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안 교수가 책을 보냈기에 성급한 마음으로 허겁지겁 읽었다. 아, 적잖이 실망이다. 이건 내가 생각하는 ‘음란’의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 사드(D.A.F. Sade) 후작 정도는 아예 상상도 못하겠지만, 적어도 <금병매>급을 기대했는데, <북상기>는 그냥 그저 그랬다. 참고로 말하자면, <북상기>는 <서상기(西廂記)>를 패러디한 것이다. <서상기>는 앵앵(鶯鶯)과 장생(張生)의 연애담을 그린 희곡으로서 중국은 물론 조선에도 널리 읽힌 고전이었다. 하지만 <북상기>는 그런 연애담도 아니다. 물론 <북상기>는 조선시대 기녀제도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있어 반갑기 짝이 없었다.

이야기가 어쩌다 보니,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시작하여 <북상기>까지 왔다. 따져보니 조선시대에는 음란한 소설을 창작하는 ‘음란서생’이 없었던 셈이다. <금병매>도 없고, 사드도 없는 이 역사는 괜찮은 역사인 것인가? 모를 일이다. 덧붙이자면 그런 책이 없는 사회라 해서 결코 정결(貞潔)한 사회는 아니라는 것이다. 도리어 겉으로 정결함을 내세우는 사회야말로 그 이면이 썩고 있을 것이다. 또 따지고 보면 음란은 일반 민중의 것은 아니다. 음란은 음란할 만한 여유가 있는 자들의 것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높은 양반들이 음란의 주체가 된다. 우리의 작가들에게 정중히 부탁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지배층의 성적 향락과 사치를 사실적으로 다룰 소설을 모쪼록 써서 이 시대의 리얼리즘을 성취해 주었으면 한다. 아마도 그 작품은 이 시대에 대한 충실한 증언이 될 것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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