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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지식인, 국어학자였던 권보상(權輔相)은 광교 근처에서 군밤을 사다가 포장지를 유심히 보았다. 뭔가 한자가 빽빽이 적혀 있었다. 심상한 종이쪽이 아닌 것 같았다. 군밤장수에게 돈을 치르고 포장지를 모두 사서 당시 조선의 고전을 간행하던 광문회(光文會)로 가져갔다. 광문회는 1910년 최남선이 민족의 고전을 수집하여 간행하고 염가로 보급하기 위해서 세운 단체였다. 당연히 광문회에는 고전에 해박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검토한 결과 군밤 포장지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책의 상당 부분은 이미 망실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 귀중한 책은 광문회에 보관되어 있다가 광문회 해산 때 최남선의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본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쪽에서 한 벌을 베껴 소장했으니,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오주연문장전산고>다.

이 책은 현재 필사본으로만 남아 있지만, 현대식 활자로 간행될 뻔하였다. 이 이야기를 잠시 해 보자. 운정(云丁) 김춘동 선생은 김수항(金壽恒, 1627~1689)의 11세 손으로 서울의 안동김씨 집안 출신이다. 해방 후 고려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전회통(大典會通)> <만기요람(萬機要覽)> 등의 중요 문헌을 번역한 한학자이기도 하다. 선생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취(就)하여’란 글에서 자신과 <오주연문장전산고>와의 관계에 대해 소상히 언급하고 있다. 이 글을 읽어보자.

1937년 노구교(蘆溝橋)사건으로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1938년 조선어 사용금지 일본어 상용, 1940년 창씨개명,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질식할 것만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어 있었던 김춘동은 1940년 설의식(薛義植)과 오문출판사(梧文出版社)를 설립했다. ‘우리 문화의 정리, 보급’이 목적이었다. 사실상 ‘배일(排日)’ 정신에서 출발한 것이었으니 당시로서는 용기가 필요한 위험천만한 사업이었다. 출판사를 차리고 간행해야 할 책을 물색했는데, 당시 이원조(李源朝)가 주관하고 있던 대동출판사에서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출판하려고 경성제국대학의 필사본을 다시 필사해 놓고 있었으나 비용 문제로 출간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춘동은 값을 치르고 그 필사본을 입수했다. 하지만 그 필사본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엉망이었다. 김춘동은 한문 실력이 날로 저하되고 있던 상황을 고려하여 이 책을 교열하고 구두점을 찍어 출판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원문이 엉망이었다. 필사할 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여 경성제대의 필사본과 대조했지만, 경성제대 쪽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길은 최남선의 소장본과 대조하는 것뿐이었다. 최남선에게 몇 차례 부탁했지만, 책에 대해 인색하기 짝이 없었던 최남선은 ‘광문회에서 보관하고 있던 중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이규경이 읽었던 책의 원본을 경성제대와 보성전문, 연희전문의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해서 교열했고 그 과정에서 능력 부족을 통감한 김춘동 등은 위당 정인보에게 간청해서 같이 혹한·혹서를 무릅쓰고 10책 분량의 구두점을 친 원고를 정리했다.

원고를 정리하던 중 희한한 사건도 있었다. 하루는 이모(李某)란 사람이 최남선이 가지고 있는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이규경의 초고이고, 경상북도 문경에 살고 있는 이규경의 먼 친척이 깨끗이 정리한 정본(正本)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정본을 빌리기는 어렵지만 그 동네를 찾아가 며칠 머물러 오류 많은 사본과 대조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김춘동은 상당한 돈을 건네고 교섭을 부탁했지만 이모는 돈만 받고 사라져 버렸다. 실제 그가 말한 주소지에는 그런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제는 전시체제를 선포하고 노무동원령(勞務動員令)을 내리는 등 한국인을 압박하였다. 1942년 일제가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키자 1943년 김춘동은 그때까지 정리한 원고를 지형으로 뜨고 후일 간행을 기약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다. 김춘동은 ‘사서연역회(史書衍譯會)’를 만들어 <삼국유사> <삼국사기>를 번역하는 데 몰두하면서 설의식과 <오주연문장전산고> 쪽 작업을 계속하기로 하였지만, 설의식은 언론계에 투신하고 자신은 고려대학으로 옮기는 바람에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원래 동아일보 기자였던 설의식은 해방 후 같은 신문의 주필, 부사장을 지냈고, 이어 새한민보를 창간하는 등 언론활동으로 바빴던 것이다.

6·25전쟁이 일어나 김춘동은 대구로 피란했고 거기서 설의식을 만났다. 설의식은 김춘동을 만나자 눈물을 흘리며 “선생의 노고도, 이 소오(小梧)의 사업도 다 귀어허지(歸於虛地)가 되고 말았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오주연문’이…?” 이것이 그들의 첫 대화였다. 설의식에 의하면 전쟁에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원고도, 지형도 모두 불길에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공허감이 두 사람을 눌렀다. 최남선이 갖고 있던 <오주연문장전산고> 역시 전쟁 통에 재가 되고 말았다. 김춘동과 설의식은 서울로 돌아가면 다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간행에 착수하자고 다짐했지만, 설의식은 1954년 5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간행은 영영 허사가 되고 만 것이다.

1968년 동국문화사에서 경성제국대학 소장본을 대본으로 하여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영인본을 만들었다. 김춘동은 그 오류투성이의 책을 보고 장탄식을 하였다. 1982년 명문당에서 다시 이 책을 영인했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일부를 번역해 5책으로 간행했다. 지금은 이규경이 인용했던 모든 책을 샅샅이 찾아 원문을 교열해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다. 어쨌거나 이 책을 이용하는 분들은 김춘동 선생을 꼭 기억했으면 한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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