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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페미니즘과 관련된 프로젝트 제의를 받으면서 갈등한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갈등은 다소 복잡한 것이었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무슨 대단한 페미니스트라고’라는 겸양도 들어있지만, 한편에는 페미니스트라고 분류되는 순간 감당해야 할 많은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늘 올바르고 도덕적이며 자기주장이 강한 여전사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남녀가 함께 모여 사는 세상에서 분리되어 여자로만 가득 찬 울타리 안에서 옳은 소리만 하는 운동가의 이미지도 떠오른다. 나는 아직 그곳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인권 운동가나 투사가 되기에는 너무 자기중심적이며 멋대로인 데다 그렇게 도덕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남자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 많은 의미에서 나는 아직은 남자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다.

그러니까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에 대한 불편함에는 완벽함에 대한 강박보다는 어떤 부정적 이미지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이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과거 나는 <디아스포라 문학>이라는 가벼운 에세이를 낸 적이 있는데, 이후 나는 본의 아니게 ‘디아스포라 문학 전공자’가 되어버렸다. 고마운 일이지만, 한편 내가 문학에서 애초에 지니고 있던 다양한 관심은 삭제되고 이후 그것에 한정된 글을 주로 쓰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떤 ‘주의자’를 경계하는 편이다. 어떤 특정 부분을 지향할 수는 있으나 어떤 인간도 그것만일 수는 없고, 우리는 조금씩 흔들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출처: 경향신문DB

‘페미니스트’란 것도 그와 유사하다. 그 모자를 쓰는 순간, 다른 정체성은 보이지 않고 호명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이 불편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어떤 공격성과 부정성이라는 단 하나의 이미지만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말 많고 따지기 좋아하고 남자들과 적대하는.’ 그러나 그 단 하나의 이미지가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 또 내가 왜 불편했는지에 대해 최근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책인데, 여기에서 그녀는 주류 페미니즘, 근본주의 페미니즘이라는 완벽한 페미니즘 대신 결함이 있을 수 있는, 다양한 복수의 페미니즘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를 “핑크색을 사랑하고 섹스를 좋아하고 가끔은 여성을 끔찍하게 표현한 노래에 엉덩이를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정비공이나 수리 기사에게 마초 대접을 해주면 내게 이익이라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더 멍청한 척을 하는” 나쁜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면서, 그 불완전한 대로의 페미니스트이기를 원한다고 공표한다.

지난 학기에 ‘페미니즘과 여성문학’이라는 강의를 맡았는데, 이 수업은 애초의 생각과는 다르게 다소 재미가 없이 흘러갔다. 왜냐하면 분석방법과 결론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불행, 고통과 원한에 ‘남자’라는 타깃을 달아주면 모든 것은 해결 가능해 보인다. 고민 끝에 그러한 일률적인 분석틀을 버리고 텍스트를 매개로 각자의 경험에 대해 토론하는 것으로 바꾸자 수업은 훨씬 더 흥미로워졌다. 그 자유로운 토론 속에서 우리들은 로맨스를 즐기고 외모를 가꾸고, 나쁜 남자를 좋아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해도, 전업주부를 열망해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었다. 페미니즘이 오직 여성의 직장, 육아와 가사의 평등, 여성의 대상화 등에 대해 똑같은 주장과 원망을 갖고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육아, 가사, 그런 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건……’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듯 여성의 수만큼 수많은 갈등과 원망이 있고, 그것은 때로 근본주의 페미니즘이 말하는 그것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한국 청년들의 고통을 전부 ‘청년실업’으로만 치부할 수 없듯이 말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앞세워 모든 것의 교정을 요구하는 것이 페미니스트라는 생각은 오류이다. ‘논리정연하고 도덕적이며 일과 가정에서 완벽한 여자, 남성과 적대하고 스커트를 입지 않는 남자 같은 여자, 희생없이 끊임없이 권익만 요구하는 이기적 페미니스트’와 같은 추상적 이미지도 환상일 뿐이다. 여성 혐오는 그러한 관념 속에서 자라난다. 다 큰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남은 생을 쓸쓸해하는 어머니, 직장 일 때문에 늘 아이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아내, 씩씩한 딸 등의 구체적인 모습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페미니스트들의 편린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록산 게이의 말처럼, 어떤 완벽한 모델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각자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인 채로 이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가 있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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