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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손잡은 한식은 권력자를 위한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권력자에게 한식을 바친 사람은 중세 궁중의 하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처 김윤옥이 끼어든 한식 세계화 사업, 그리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아래 사라진 미르재단의 “‘한식 DNA’를 품은 글로벌 셰프 양성” 기획 속의 한식은 그들만을 위한 한식을 대변한다. 여기서 만들어진 한식은 한국인이 먹어본 적도 없고, 한국인이 먹을 일도 없는 한식이다. 다만 사진과 영상은 잘 받아서, 특정 인물을 위한 장식품으로는 꽤 쓸 만한 소품이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를 통해 범죄의 내막이 새로 밝혀지고, 장관과 재벌이 재판에 넘겨지자 많은 사람들이 시원해했다. 하지만 한식은 여기서도 찬밥이었다. 최경희 전 이화여대 총장은 국정조사 특위 제4차 청문회에서 미르재단 관계자와 프랑스 요리학교 에콜 페랑디 분교 유치를 논의했음을 인정했다. 한식 세계화를 매개로 한 최순실·정유라 의혹의 한 고리가 드러난 순간이었지만 그뿐이었다. 미르재단 전 사무총장이 “에콜 페랑디 사업의 최종 결정권자는 최순실-차은택”이라고 말했어도 그뿐이었다. 이를 둘러싼 의혹은 특검의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서 음식 시중을 들던 사람들이 보잘것없는 심부름꾼, 하찮은 말석의 인물로 보였는지 모르겠다.

온갖 매체가 요 몇 년 사이에 요리사를 연예인으로 떠받들고 있다. 덩달아, 성공했다는 0.1%의 한식당,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한식당 몇몇 곳만이 매체와 일간지 문화면을 수놓는 즈음이다. 그런 가운데 대화를 나눈 청년 요리사는 자신의 처지와 사뭇 다른,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한식 세계화 담론, 한식 담론 앞에서 지독한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울러 지독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가령 그동안 대통령 부인에서 대통령, 그리고 기관장이 주인공으로 둔갑한 ‘한식 화보’ ‘한식 홍보물’은 어떤가. 주인공이 마땅히 음식이어야 할 자리에, 요리사가 드러나 마땅할 자리를 특정 인물이 차지한다. 음식 하는 사람이라면 입지 않을 옷을 입고, 머리 장식을 하고, 짙은 화장을 하고, 어색한 동작으로 음식 주무르는 사진을 찍는다. 음식이 있을 자리, 요리사가 있어야 할 자리를 권력 있는 사람이 독차지한 화보를 펼쳐 놓고, 청년 요리사가 탄식했다. “우린 하인이니까.”

매체의 시대, 영상의 시대에 음식의 매력과 본질을 드러내는 연출은 필요한 작업이다. 그러기에 청년 요리사는 더욱 화가 났다. “음식을 찍어야지 왜 그 사람을 찍어요? 그럼 한식 화보가 아니라, 그 사람 화보잖아요. 그 사람 홍보잖아요.”

외국인 취향 한식, 외국인 입맛에 맞는 한식이라는 식의 한식 세계화 담론 앞에서는 거의 절망했다. “외국인 입맛에 맞춘다고 제 나라 음식을 바꾼 나라가 있어요? 그게 가능은 해요? 그리고 그 외국은 어디래요. 그냥 미국, 유럽, 일본인이 외국인의 다인가요?”

실제 여행 경험으로나, 한국 속 국제 경험으로나, 인터넷 경험으로나 이전 세대하고 전혀 다른 ‘외국’을 감각하며 오늘에 이른 청년 요리사의 세계는 미국, 유럽, 일본을 못 벗어난 사람들의 세계보다 훨씬 넓은 세계를 실감하며 걱정했다. “푸드 트립(식도락 여행)? 낯선 데 가는 게 여행이죠. 낯선 음식도 먹고. 낯설어서 한식을 기대할 수도 있을 텐데. 서울에서 맥도날드 못 찾아 굶어죽을 외국인은 없을 거고.”

이윽고 청년 요리사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으로 들어섰다. “세계화가 뭐예요? 아직 한식은 무언지 한식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데. 한식을 세계화하는 게 뭔지, 왜 세계화해야 하는지 물어본 적도 없잖아요.” 근본은 실제로 건너갔다. “배울 데나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코르동블루, 시아이에이, 츠지, 핫토리 수준의 한식 학교가 없는데. 실습 나갈 마땅한 한식당도 전혀 없고요.”

외국인 입맛에 맞춘 한식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관계자들끼리의 호언장담, 관계자만 아는 구미, 일본 출신 외국인이 인사로 건넨 “맛있어요”가 출발선일 수 없다. 한식이 2월28일 수사를 종료한 특검한테도 버림받았다며 쓰게 웃는 청년 요리사는 “내 처지, 현실, 근본적인 질문, 앞으로 할 일을 정직하게 확인하는 데가 출발선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다만 음식에, 한식에 머물 말이 아니었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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