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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저마다의 진실

opinionX 2017. 2. 23. 10:51

사랑하는 이가 어느 순간 떠나고 나면 남는 것은 ‘진실’에 대한 기억뿐이다. 건너가지도 못한 진실, 건너갔으나 닿자마자 변형된 진실, 나에게 비로소 도달했으나 알 수 없었던 그의 진실. 상호모순되는 진실들이 어느 순간 뒤죽박죽 엉키면서 안개가 어리기 시작한다. 우리의 진실이 어느 시공간에서 부유하고 있는지 어디선가 공허한 바람 소리도 난다. 그때의 진실을 이제 와 감정으로 만져본 것뿐이데 어느새 해지고 있다. 진실은 본래 그토록 연약한 것일까.

박사 과정 초기 시절 꽤나 여러번 지도교수들과 사회과학에서의 ‘사실’과 ‘의견’에 대해 논쟁을 했다. 어느 날 나는 두 분의 지도교수들에게 한국과 일본의 비정규직 확대에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해보겠다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분이 나에게 “너 과학자가 되고 싶은 것이 맞니?”하고 물었다. 다른 한분은 키득 웃으시며 “우리는 왜 자꾸 네가 정치가 같을까?”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무척 당혹스러웠지만 그 에피소드는 연구할 때마다 나를 긴장하게 한다. 증거가 되는 자료, 사실 등을 찾아내어 들여다보고 만지작거리다 보면 진실이 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보여주는 예쁜 무지갯빛처럼, 나는 진실이 비추고 있는 여러 색깔 중 마음에 드는 색만 골라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 당시 생존했던 단원고 학생들이 7일 세월호 참사 1000일 추모 11차 촛불집회에서 무대에 올라 발언하자 희생된 학생들의 부모들이 다가가 안아주고 있다. 강윤중 기자

연구자가 진실을 분석하고자 할 때는 사실에 기반을 둔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특히, 사회과학에서는 개별적 삶에 대한 구체성이 결여되면 어떤 정책이나 이론도 허무한 맹목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반면, 정치가의 말에는 늘 추상성이 있다. 추상화된 언어는 사실 권력자들만 구사할 수 있다. 권력자의 힘이 강할수록 구체성과 사실은 감추고 뻔뻔하게 사실을 추상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추상성의 정도가 곧 권력의 정도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2016년을 ‘탈진실(post-truth)’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이 단어는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과 개인적 신념이 사람들의 의견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뜻한다. 개인들이 과학적 증거들보다 감정에 쉽게 설득당할 수 있게 되면 진실에 대한 판단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따르게 된다. 진실은 온데간데없거나 ‘저마다의 진실’들이 너무 많아져, 감정의 설득력이 더 커지는 것이다.

탈진실은 공적 정보 및 자료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과 냉소가 팽배해질 때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소셜미디어나 온라인상의 상호작용을 통해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 댓글과 ‘좋아요’ 횟수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감정 묻은 정보들이 진실의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이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지식은 점점 세분화되어 파편화된 진실의 조각들은 각 개인들을 설득하기가 너무 가벼워졌다. 작은 진실의 조각들은 범람하고 있는데 우리는 점점 더 진실을 갈구하게 됐다.

이러한 탈진실의 시대에 위험한 것은 권력가의 현혹이다. 이 때문에 탈진실의 시대에 권력자의 말은 위험하고 동시에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사실보다 감정이 개인들의 의견에 영향을 미치는 탈진실 시대에 최고 권력자가 ‘북한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라고 추상적인 말 한마디를 한다면, 그 효과를 그가 모를 리가 없거니와 몰라서도 안된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저마다의 진실이 공존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저마다의 진실들이 경합하는 경우 각 개인들이 이성에 따라 판단할 수 있도록 열린 토론과 원활한 정보검증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매체들, 시민단체, 학자 그리고 시민들은 지속적으로 진실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지속적으로 정보공개를 요청하고 사실을 검증해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세월호 참사의 원인에 대해 잘 모른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문인과 예술인들조차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니 제대로 된 진실 경합은 언제 시작될 수 있을지 답답하다. 이미 닳고 있는 진실이 만질 수도 없는 안개 속으로 영영 사라질까 두렵다.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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