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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운전을 하다가 손님의 차를 긁었다. 폭이 그다지 넓지 않은 기계식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그렇게 됐다. 아무래도 조수석의 사이드미러가 긁힌 것 같았다. 손님, 그러니까 차의 주인은 이거 어쩌지, 하는 한숨을 쉬면서 창문을 열어 긁힌 데를 살폈다. 사실은 그가 “여기 괜찮아요”라고 말했고 그래서 엑셀을 밟은 것이었다. 무언가 억울하기도 했으나 나는 죄인이 되어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손님은 나에게 어두운 표정으로 “조금 긁힌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목적지로 가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불편한 타인의 운전석이었다. 여러 감정들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우선은 나의 미숙함으로 소중한 차에 흠집을 냈으니 미안했고, 그러면서도 외제차가 아니라는 데 안도했다. 나는 왜 고작 1만2000원을 벌자고 이 밤에 나와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손해를 보고 있나 싶어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손님의 그 ‘조금’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저 사람의 조금은 과연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뭐 괜찮네요, 하고 웃고 지나갈 수 있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도색비를 어느 정도 받겠다는 것인지, 아예 보험처리 절차를 제대로 밟겠다는 것인지 답답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당신의 조금은 얼마입니까?”라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괜히 그의 심기를 건드릴 것 같아서 묵묵히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운전만 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려서는 손님과 함께 사이드미러를 살펴보았다. 거뭇한 자국이 손톱 크기만큼 묻어 있었다. 과연, 조금이라면 조금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손님은 손가락으로 흠집을 몇 번 문질러 보았고 그에 따라 자국이 조금씩 지워졌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나에게 “그냥 가세요…”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고는 빠르게 거기에서 나왔다. 보험처리를 원하면 연락을 달라고 하거나 하다못해 감사의 인사라도 정중하게 했어야 하지만, 그의 마음이 바뀔까 두려웠다. 나약한 한 인간은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심호흡을 하며 걷는 동안 처음으로 ‘조금’이라는 적당한 말이 주는 폭력에 대해 상상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 모호한 부사를 습관처럼 자주 써 왔다.

“설탕은 조금만 넣어주세요”, “조금 후에 갈게요”하는 일상의 언어. 그러나 그것이 갑과 을의 관계에서 유통될 때는 을의 자리에 있는 이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갑이 을에게 “조금 생각해 보자”, “이건 조금 마음에 안 드는데”라고 할 때의 ‘조금’은 우리가 아는 조금이 아니다. ‘적당히’, ‘많이’, ‘잘’과 같은 언어들이 모두 그렇다. 갑의 자리에서 하고 을의 자리에서 듣는 모호한 언어는 폭력이 된다.

그날 이후, 나와 타인을 위해 ‘조금’은 더 조심히 운전하고 있다. 그에 더해 말조심은 갑의 자리에 있을 때 오히려 더욱 해야 하는 것임을 알았다.

모호한 언어뿐 아니라 헛기침이나 하품과 같은 몸짓에도 누군가는 상처받는다.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고 해도 거기에서 감정을 읽어내고 아파하는 이들이 있다.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발화할 수 있는 편안한 자리에서 우리는 가장 불편하게 존재해야 한다. 내가 선택한 단어가, 몸짓이, 아니면 그 무엇이 타인에게 불필요한 두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규정하자면, 그것은 일상화된 ‘갑질’이다. 내가 편안하다면 누군가는 불편하다.

오늘도 어느 사장님이, 연예인이, 재벌 3세가 ‘갑질’을 했다는 뉴스가 들려오고, 우리는 거기에 분노한다. 그러나 나도 그렇듯 정작 스스로 행하는 일상의 갑질에는 관대하다.

그것이 훨씬 우리의 삶을 위험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나는 이제야, 타인을 향한 나의 언어와 몸짓을 되돌아보기로 한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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