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조주은 | 국회 입법조사관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의 일이다. 학력고사를 마치고 미팅에서 만난 한 남학생과 아주 짧은 기간 교유하였던 적이 있다. 좋았던 감정도 잠시, 결국 헤어지자는 편지를 보냈다. 연습장에 미리 편지 내용의 초고를 작성했다. 그리고 하얀색 편지지에 한자 한자 정성껏 연습장의 초고를 참고하여 편지를 써내려갔다. 무려 10장으로 마무리된 편지를 하얀색 편지봉투에 우표를 붙여 빨간색 우체통에 넣었다. 이별의 편지를 보낸 후 답장을 받기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당시에는 기다림이란 당연히 ‘견뎌내야 하는 시간’의 다른 말이었다.


최근 10여년 동안 사람들의 일상, 일터와 가족생활에 가장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요인 중의 하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이다. 이제는 변화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일상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사용은 사람들의 관계 맺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가끔 텔레비전을 시청하다보면 연예인들이 “애인으로부터 문자메시지로 이별 통보를 받았다”며 서운함을 표현하는 경우를 본다. 


e메일이나 문자메시지를 통해 사람들의 관계가 하루 만에 종료되기도 한다. 20여년 전에는 한 달이 소요되었던 관계단절 의식이 이제는 하루 만에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의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의 일상은 어떤 면에서 한 달을 하루로 압축하여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불필요한 시간으로 간주된 지 오래다.


현대인들은 “바쁘다, 바빠”를 입에 달고 살아간다. 이처럼 분주해지고 바빠진 이유 중의 하나는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편화 때문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특성은 “빠른 답변요구”를 특징으로 한다. 누군가가 내게 보낸 휴대폰이나 카카오톡의 문자메시지에 대하여 수분 안에 답신을 보내지 않으면 나의 요구를 무시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속전속결의 사회이다. 답장과 e메일을 보내야 할 것들을 기억해야 하는 현대인들의 머리와 손은 점점 복잡하고 빨라져야만 적응이 가능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소위 속도사회에서 시간과 장소의 경계가 해체되어가는 과정을 가장 역동적으로,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일하는 어머니들이다. 자녀양육과 가사노동, 친족관리 노동의 책임까지 떠맡느라 여가시간이 부족한 여성들에겐 승용차로 출퇴근하는 이동시간이 유일한 ‘나만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자녀가 다니는 학교와 학원 등으로부터 쉴 새 없이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날아온다. 그 문자메시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자녀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얻는다. 



그렇다면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통해 잠시 자녀의 학교와 유치원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는 시간은 과연 근무시간일까, 가족시간일까? 참으로 경계짓기 어려운 시간이다. 이처럼 경계짓기 애매한 시간들이 늘어나면서 일하는 여성들은 더욱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다. 휴대폰을 통해 자녀와 가족구성원에 대해 원격관리가 가능해진 사회. 축복일까, 불행일까?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