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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세계적 재난도 견디기 어려운데, 그 와중에 터진 반인륜적 범죄가 우리를 충격에 빠트렸다. 감염병 대유행으로 인한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로 서로를 고립시키더니 퍼질 대로 퍼져버린 반인권적 범죄가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켜 버렸다.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선언한 헌법국가에서 인간 존엄성에 대한 도전이 은밀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조두순’을 넘어 웹하드 카르텔, 버닝썬, 웰컴 투 비디오 그리고 이번 텔레그램 n번방 사건까지 끊이지 않는 추악한 범죄가 이제 음지로 파고들었다. 아동 성폭행범의 대명사 ‘조두순’ 사건이 벌어진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직접적인 성폭행·강제추행이라는 전통적 젠더폭력에서 성착취 영상을 제작·유통·소지하는 새로운 젠더폭력으로 양상만 달라졌을 뿐이다.

조두순 사건 이후 아동·청소년 성폭행범죄가 연속적으로 발생하자 정부와 정치권은 성폭력범죄 처벌 및 예방을 강화한 대책과 법안으로 성범죄자 신상정보 인터넷 공개, 전자발찌 부착 기간 연장, 성충동약물치료법, 성범죄자 등 흉악범 DNA 정보법, 공소시효 폐지 등을 내놓았다. 자유형의 상한도 15년에서 30년으로 상향하고 성범죄 양형기준도 높였다. 성범죄는 안전의 척도가 되는 위험인지의 징후범죄가 되었고 성형법 강화는 형사정책의 슬로건이 되었다. 강력범죄가 발생하면 자신도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응보감정이 살아나 괴물 같은 범죄자를 오래 가두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중한 형벌이 범죄 예방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엄벌주의 형사정책을 부추긴다. 여기에 국가는 형벌권과 형사입법권으로 무력시위를 한다. 그러나 효과 없음은 날로 증가하는 범죄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성폭력범죄가 10년 만에 거의 2배나 증가하였다. 조두순을 대체할 자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중형주의 형사정책만으로는 성범죄율을 낮추기에 역부족임이 드러났다. 법정형뿐만 아니라 실제 선고형도 어마어마한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 교도소가 포화상태라는 뉴스가 이를 증명한다.

지금 당정이 내놓은 대책도 강성화 형사정책 일변도다. 형의 하한 설정 및 공소시효 폐지, 처벌 법정형 상한 확대, 재범의 경우 가중처벌 및 상한선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n번방 재발 방지 3법(형법, 성폭력처벌법, 정보통신망법) 및 청소년성보호법 등 법개정과 피해자 보호 대책이다. 조두순 사건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다짐했지만 선거가 코앞이라 내놓은 소리로 들린다. 돈과 시간이 드는 근본적인 대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언론에도 미국보다 법정형이 턱없이 약하다거나 법원의 선고형량이 물러터졌다는 얘기뿐이다. 정치권의 이해가 딱 그 지점에서 맞아떨어져 돈이 들지 않는 법정형의 강화와 양형기준의 상향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형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처벌 입법의 공백을 메우고 일벌백계한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디지털 성범죄가 중범죄임을 법전에 적어 놓는다고 단숨에 해결될 일도 아니다. 엄벌주의는 처벌의 확실성이 보여야 효과적이다. 법망을 피해갈 수 없다는 생각이 범죄유혹을 떨치게 한다. 디지털 성범죄자들은 엄한 처벌에 겁먹을 자들이 아니다. 접속이 어려운 온라인 공간으로 숨어들면 처벌도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적발하여 처벌하는 것에 그치면 수많은 ‘박사’의 후예들은 깊고 깊은 다크웹을 찾아 들어갈 것이다. 

당장 강력한 수사와 처벌로 급한 불을 끄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범죄 대책은 망라적이어야 한다. 제재수단만 총망라해서는 안된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가장 좋은 사회·복지·교육 정책이 가장 좋은 범죄정책이다. 중형주의 형사정책 일변도에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차별금지법조차 제정하지 못하는 사회,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왜곡된 성문화, 여성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남녀불평등 사회에서는 지배와 권력의 과시로 표출되는 성폭력범죄, 성착취범죄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정보통신기술을 개인정보 보호와 익명성 보장이라는 선한 수단이 아니라 돈벌이의 악한 수단으로 악용할 기회는 열려있다. 거기에 남녀차별과 성 불평등의 사회구조가 죄의식 없이 범죄를 저지르게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성화 형사정책만 동원하는 정치, 법만 뚝딱 만들고 손 터는 정치가 아니라 누구나 존엄성과 존중의 대상으로 인정받는 사회, 성차별과 혐오가 없는 평등한 삶이 보장되는 사회로 바꿔나갈 정치다. 더디지만 긴 앞날을 내다보는 정치가 필요하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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