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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는 저출산 문제를 극복할 방안이 활발하게 논의됐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성평등 정도가 높을수록 출산율이 높아지는데 아빠들의 육아휴직이 잘 안되고 있다”면서 “‘독박 육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저출산 극복 종합 대책도 좋지만 문제는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할 시간도 없다는 것”이라며 “노동 시간을 과감하게 줄여야 일자리도 늘고 가족공동체도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5년 후에는 여름휴가를 한 달간 사용하는 대한민국이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앞서 지난달 28일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가는 전용기에서 “연차 휴가를 모두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이 솔선수범해 마음놓고 휴가를 쓸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하겠다는 의미였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잘 알려져 있듯이 한국은 노동시간이 길기로 유명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6 고용동향’에 따르면 한국의 2015년 기준 국내 취업자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2113시간으로 OECD 회원국 34개국 평균(1766시간)보다 347시간이나 많았다. 이러니 남녀를 불문하고 아이를 낳을 시간도 돌볼 시간도 부족하다.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들이 청와대에서 저출산 문제를 논의하면서 노동시간 단축과 휴직·휴가 문제를 언급한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그러나 논의 내용을 들어보니 뭔가 아쉽다. 남성들의 육아휴직을 장려하고, 노동자들의 연차휴가 사용률을 높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이번에는 빠진 것 같다. 바로 제 시간에 퇴근하는 일이다. 당장 퇴근 후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직장인들에게는 다음달에 예정된 휴직이나 휴가보다 오늘의 ‘칼퇴근’이 더 절실하다.

지난해 7월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169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를 보면 이들은 일주일에 평균 3.6번 야근을 하고, 야근 1회당 3시간42분씩 초과 근무를 하고 있었다. 주 5일 근무를 한다고 치면 3~4일은 밤 9~10시에 퇴근하는 셈이다.

야근을 하는 이유로는 업무량 과다(54.1%·복수응답)가 가장 많았고, 야근을 강요하는 분위기(34.5%)도 한몫했다. 상사가 퇴근하지 않아서(21.3%) 야근을 하기도 했고, 퇴근 시간에 임박해 업무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21.1%)도 적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이는 엄마·아빠가 시간을 낼 수 있는 휴가나 휴직기간에만 자라지 않는다. 평일에도 자라고 똑같이 누군가의 손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손은 가능하면 부모의 것이어야 한다.

‘칼퇴근’을 가끔씩이라도 해본 부모들은 안다. 평소보다 1~2시간 더 일찍 집에 가는 것만으로 ‘깨어 있는’ 아이를 만날 수 있고, 자기 전까지 함께 뒹굴 수 있다. 하루종일 ‘독박육아’에 시달린 배우자에게 작게나마 여유를 줄 수도 있고, 함께 유모차를 밀며 동네산책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의 야근문화는 이 소소하지만, 큰 행복을 ‘불가능한 일’로 만들어 버린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대선 후보 시절 ‘칼퇴근법’을 공약했다. 더불어민주당의 공약집을 통해 ‘눈치야근’ 잡는 출퇴근시간 기록 의무제를 도입해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애석하게도 이 공약은 지난 19일 공개된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의 100대 국정과제에 들어가지 못했다. 물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이 거셌을 것이고, 더 시급하다고 판단한 정책도 있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퇴근’은 다른 어떤 정책보다 앞에 있어야 했다. 12시간짜리 어린이집 종일반 제도는 부모가 직장에 있는 동안 아이들을 돌볼 수는 있지만, 온전히 그 가치를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저출산 해결, 그리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아이와 부모에게 함께할 저녁시간부터 주는 것이 먼저다.

홍진수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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