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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와 달랐다. ‘혼밥’이란 단어를 접하고 잠시 혼란스러웠다. 집밥은 집과 밥이 결합된 말이어서 금세 알아차렸는데 혼밥 앞에서는 멈칫했다. ‘혼’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막막했다. 알고 보니 혼밥이란 ‘혼자 먹는 밥’이었다. 집밥이 역설적으로 집과 밥이 분리된 사태를 의미한다면, 혼밥은 집밥에서 한걸음 나아가 1인 가구의 신산스러운 삶을 지시한다. 집을 떠났거나 집에 혼자 남은 400만 1인 가구가 매일 혼자 밥을 먹고 있다.

혼자 밥 먹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늦은 오후 중국집에서 혼자 짜장면을 먹는 중년 사내, 자정 무렵 귀가해 혼자 찬물에 밥을 말아먹는 전문직 여성.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영화나 소설을 통해 한두 번 접해보았을 것이다. 우리 시도 밥에 대해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가 황지우의 ‘거룩한 식사’다. 시의 화자는 분식집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의 “풀어진 뒷머리”를 보며, 또 파고다공원 근처 순댓국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을 보며 눈물겨워 한다.

함민복의 ‘눈물은 왜 짠가’의 무대 역시 식당이다. 가세가 기울어 서로 헤어져야 하는 모자(母子)가 설렁탕집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어머니는 중이염이 심해 고깃국을 먹지 못한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국물이라도 더 먹이려고 식당 주인에게 너무 짜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한다. 주인은 눈치를 챘지만 모른 척하고는 국물에다 깍두기까지 가져다준다. 어머니와 주인의 속내를 읽은 아들은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내며 혼잣말을 한다. “눈물은 왜 짠가.”

늦은 밤 편의점에서 혼자 컵라면을 먹다가 낯선 남자를 배려하는 시도 있다. 이경숙의 ‘겸상’. 시의 화자는 여성인데, 한 남자가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올려놓으며 어깨를 나란히 한다. 화자는 그 남자와 함께 늦은 저녁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상상한다. 자발적으로 “외간 남자”와 겸상을 하는 여성의 마음 씀씀이는 함민복 시의 설렁탕집 주인보다 격이 높아 보인다. 그녀는 “그가 허겁지겁 먹지 않도록 나란히 서서 오래도록 젓가락을 들고 있었다”.


집밥백선생_경향DB


음식을 주제로 한 시는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일제강점기 백석을 필두로 김지하, 천양희, 조정권, 윤제림, 안도현, 문태준, 이규리 등 우리 시를 대표하는 시인들이 자신의 시에 밥을 초대했다. 밥을 테마로 한 시를 엮은 시집 <밥>(정끝별 엮음)까지 나왔을 정도로 시인들은 밥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다. 밥은 일찍이 하늘이고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밥에서 공감과 나눔, 배려와 연민을 발견해왔다.

집밥, 혼밥과 함께 먹방, 쿡방이란 신조어가 잇따르고 있다. 셰프나 레시피란 외국어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공중파나 케이블, 인터넷 곳곳에서 음식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연일 화면을 채우고 있다. 독거사회가 어느새 식탐사회로 옮겨가고 있다. 먹방을 틀어놓고 혼자 밥을 먹거나 식탐을 해소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미디어를 통한 과도한 식탐 현상을 푸드 포르노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먹방의 생산과 소비 구조가 포르노와 다르지 않다는 분석이다.

식탐사회 앞에서 ‘밥시’를 환기하는 이유가 있다. 밥 앞에서 삶과 사회를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밥시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위에 소개한 시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밥시를 좋은 시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감정이입이다. 타인을 자기화(동일시)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시의 마음’이 있다. 내 앞에 있는 사람, 혹은 지금 내 앞에 없는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기. 사람뿐 아니라 다른 생명, 사물, 자연이 되어보기. 이것이 시의 마음일 것이다.

혼자 밥 먹는 사람이 늘어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밥 먹듯이 해온 말이지만) 밥상이 둥근 이유는 여럿이 둘러앉아 함께 먹기 위해서다. 평화(平和)에는 평상에서 밥을 같이 먹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 혼밥이 많은 사회는 공동체와 평화로부터 멀어지는 사회다. 사회가 없는 사회, 가장 나쁜 사회다. 밥상머리에서 생각해보자. 시의 마음은 상상력에서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시의 마음은 근원에 대해 질문한다.

혼밥 앞에서 묻되 나는 왜 혼자 먹는가라고 묻지 말자. 그러면 자괴감에 빠지기 십상이다. 가정환경을 탓하고 짧은 가방끈과 이력서를 문제 삼게 된다. 원인은 대부분 외부에 있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누가 혼자 밥을 먹게 하는가. 무엇이 1인 가구에게 ‘흙수저’를 들게 하는가. 그렇게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나쁜 정치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쁜 경제에 휘둘리는 나쁜 정치 말이다.


이문재 |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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