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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에 머문 25일 동안 우리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단어는 ‘화쟁(和諍)’이었다. 다툼을 화해한다는 뜻이다. 혹은 평화롭게 다툰다는 의미로도 해석한다. 원효에 의해 제시된 화쟁은 부분에 집착해 전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걷어내고 다른 차원과 높은 차원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조계종 화쟁위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모두가 사는 길을 성찰하고 모색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계종의 공적기구이다. “중생의 병은 무지와 탐욕에서 생기고 보살의 병은 연민에서 생긴다”고 <유마경>은 말하고 있다. 다양한 욕구와 가치가 충돌하는 삶의 현장에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대변하면서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길을 찾는 화쟁은 자비구현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조계종 화쟁위원회는 한상균 위원장 문제를 화쟁의 정신과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사태는 공권력의 강제집행을 유보하고 한 위원장이 자진 출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물리적 충돌을 막고 평화적이고 원만하게 해결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대화와 타협의 자리를 마련해주지도 못하고, 암묵적 압력으로 강제 퇴거시켰다고 말한다. 나아가 조계사가 더 이상 이 시대의 ‘소도’가 아니라는 평가도 많다.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다. 극한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안전하게 보호 받으면서 정당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 정당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전달해주는 ‘제3지대’가 사라져버린 것은 결국 사회 구성원 모두의 손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한상균사태 이후 도법 스님의 화쟁에 대한 비판도 일각에서는 제기되고 있다. 그 선한 뜻을 의심하지 않으며, 화쟁의 가치 또한 존중하지만, 화쟁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회의하고 비판하고 있다. 필자는 도법 스님이 모든 생명이 상생하는 화엄세계를 이루기 위해 대안을 일군 지리산 실상사에서부터 지금까지 20년 동안 모시고 가르침을 받아왔다. 그 때문에 그 진정성과 열정을 누구보다도 믿는다. 그리고 사석에서는 비판적 직설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자기의 경계에 갇히지 않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화쟁의 정신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다듬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쟁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염려는 한결같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화쟁은 정확하게 ‘사실’을 파악할 때 갈등을 해결할 수 있고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진실이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화쟁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주장과 주장이 충돌할 때, 그 양측 모두를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으로 판단해 나름대로 옳지만 모두가 틀렸다고 하는 진단은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모든 갈등 하나하나에는 각기 다른 원인과 환경이 존재하고 있다. 어떤 충돌이 생겨 공정하게 사실을 파악해보니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크게 잘못한 사실로 판명되었다.

이런 경우 충돌하는 양자를 나름대로 ‘일리 있는 대결국면’으로 판단하고 화쟁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래서 갈등과 충돌이 일어날 때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양비론과 양시론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판단과 시각은 사태의 초점을 흐리게 하고, 일시적으로 봉합하고, 마침내 힘있는 세력들의 부당한 반칙과 폭력을 은폐하고 정당화시켜주는 화쟁이 될 수 있다.

화쟁은 때로 어느 ‘편’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화해와 상생을 추구하며 “다른 것이 틀린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자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자칫하면 매우 위험한 함정을 갖고 있다. 인종, 성별, 종교, 지역에 따라 문화와 규범과 방법이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차이가 있다고 해서 부당한 불이익을 주는 사람들의 생각과 차별적 행위는 옳지 않다고 판단하고 수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름’을 차이와 다양성, 혹은 일리 있는 생각과 행위로 인정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도시 곳곳에서 세입자와 건물주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을 파악해 볼 때 건물주가 세입자의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지나치게 세를 올리고 있다면, 그 갈등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럴 때는 어떻게 화쟁해야 하는가. 세입자의 편을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함께 살아가자고 건물주를 설득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함께 사는 길을 법으로 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 미워하지 않고, 이해하고, 웃으면서 손을 잡게 하는 일이 진정한 화쟁의 정신이고 방식일 것이다. 탐욕과 독점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교묘한 옳지 않음이 너무도 많다. 파사현정(破邪顯正)하고 이해와 사랑으로 상생하는 길, 이것이 진정한 화쟁이 아닐까?


법인 스님 | 대흥사 일지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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