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최근 소셜미디어와 공론장에 새삼스레 이른바 ‘86세대’에 관한 담론이 넘쳐나고 있다. 영화 <1987>의 흥행과도 관련이 있지만, 우리나라 정치지형의 변화에 대한 진단의 맥락도 크다. 단순한 가십 거리가 아니다. 경향신문이 ‘장기 386시대’라는 역사기술적 명명까지 하고 나설 정도로 이 세대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은 시대진단의 핵심에 있다. 나 자신도 이 세대에 속하는데,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와 이 세대, 아니 ‘우리’ 세대의 본격적인 주류 등극을 연결 짓는 논의들을 보면서 솔직히 조금 착잡하다.
‘1987’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가 잘 묘사하고 있듯이, 1987년 우리나라는 특히 우리 세대에 속하는 숱한 이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민주화’라는 역사적 성취를 이루어내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민주세력과 군부 세력의 어정쩡한 타협에 기초했던 그 성취는 매우 제한적인 의미밖에는 가지지 못한다고 해야 한다. 그때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른바 ‘87년체제’는 기본적으로 ‘결손 민주주의’ 체제로서, 그동안 숱한 한계들을 노정해 왔다. 우리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체제가 권위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 했다. 사회경제적으로도 우리 사회는 이후 양극화와 불평등의 심화 때문에 큰 고통을 겪어 왔다. 최장집 교수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자신의 책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는 진단으로 시작해야 했을 정도로 문제는 너무도 현저하다.
틀림없이 우리 세대는 스스로에 대해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지독한 입신양명주의를 문화적 유산으로 갖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야만적 억압에 맞서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사회적 연대와 공동선을 위한 삶을 살았던 나의 많은 친구와 선후배들은 적절한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촛불혁명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몫을 해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 사회가 지난 30년 동안 반쪽짜리 민주주의밖에는 가질 수 없었던 데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식 세대이기도 한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암담한 현실을 만들어낸 데 대해 깊은 책임감도 가져야 한다.
물론 우리가 무슨 악의를 가지고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선의가 넘쳐서 문제일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오늘 우리 사회의 병든 현실을 만드는 데 일정하게 기여했다고 해야 한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는 대부분 이 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하고,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런 만큼 우리에게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불의를 바로잡는 데 앞장서야 할 모종의 역사적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의 한계에 대한 깊은 성찰부터 해야 한다. 사실 ‘박정희의 자식들’이기도 했던 우리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새 시대의 주인공인 양 자처해 왔다. ‘민족’과 ‘계급’이라는 두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었던 우리의 이데올로기적 환상과 거기서 비롯된 시대착오적인 정치적 세계관은 자주 우리 민주주의와 실천을 일그러뜨리곤 했다. 진보를 자처하는 우리의 가정과 직장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이 시대적 한계를 벗어던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식들이기도 한 청년세대의 성장을 지원함으로써만 우리의 책임을 가볍게 할 수 있다. 우리 세대의 탐욕이 ‘헬조선’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틀림없이 지나치다. 하지만 우리들의 번듯함이 청년들의 절망이라는 기반 위에 서 있음은 분명하다. 청년들이 무기력하기만 하고 비트코인 투기나 한다고 비아냥거려서는 안된다.
그런 모습은 우리들이 앞장서 만들어내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막지도 않았던 우리 사회의 무한 경쟁과 승자독식의 삶의 문법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그들이 희망을 가지게끔 도와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방적으로 답을 제시하며 이끌겠다고 나서지는 말자. 공감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일어나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키우도록 배려하자. 바로 청년세대의 주체화와 역량강화를 돕는 게 우리가 책임을 다하는 가장 적절한 방식이다.
지금 우리 세대가 가진 권력과 영광은 어떤 역사적 행운의 결과이지 도덕적으로 마땅히 누려도 좋은 응분의 대가는 아니다. 오만이라는 악덕이 그 행운을 파멸의 시발점으로 삼지 않도록 철저히 경계할 일이다. 우리들이 그토록 우리의 성취라며 자랑스러워하고 싶은 민주주의는 무릇 단지 겸손한 자들만이 누리고 꾸릴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지난 칼럼===== > 장은주의 정치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깊은 민주주의 (0) | 2018.03.20 |
---|---|
‘이면헌법’을 없애는 두 개의 길 (0) | 2018.02.20 |
안철수와 보수의 개혁적 재정립 (0) | 2017.12.26 |
‘파수꾼 민주주의’ (0) | 2017.11.28 |
[장은주의 정치시평]‘촛불’의 민주주의적 의미 (0) | 2017.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