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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에 한 번꼴로 찾아뵙는 선생님이 있다. 회의 비슷한 모임인데 특별한 주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꼴사납게 돌아가는 세상사에 ‘맵고 짠 양념’을 치면서 딴 세상을 꿈꾸는 자리다. 선생님께서 칠순에 가까워지면서 화제가 조금 바뀌었다. 몸 여기저기에서 고장 신호가 난다는 말씀을 자주 꺼내신다.

평생을 영문학자로 사셨고, 그 절반 이상을 잡지 편집에 바치셨다. 나는 진작부터 선생님을 ‘세계적인 1인 미디어’라고 불러왔다. 멀리서 보면 깐깐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문학자이지만, 속내는 젊은 시인 못지않게 여리시다. 약자나 소수자는 물론 생명 없는 것들에 대해서까지 연민과 연대가 한없이 넓고 깊으시다. 시 씁네 하는 내가 부끄러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번 인사동 밥집에서 만났을 때 하신 말씀이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내려갈 때가 더 힘들어.” 처음에는 무슨 선문답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계단을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훨씬 더 고통스럽다는 구체적 호소였다. 그러고는 젊은이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을 탓하셨다.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는 것 위주로 설치하는 걸 보면, 횡단보도 신호를 짧게 하는 걸 보면, 노인을 위한 사회는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며칠 전 책장을 훑어보다가 전에 보이지 않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지난해 5월에 나온 책인데 몇 번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던 책이다. 그런데 지난 주말, 서문을 읽다가 빨려들고 말았다. 내려가는 게 더 힘들다는 선생님의 한마디가 책에 강한 자력(磁力)을 부여했던 것이다.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여러 차례 탄식과 탄성이 반복됐다.

1990년대 미국 요양원 실태를 접할 때는 한숨이 나왔고, 그런 요양원을 혁신하는 젊은 의사의 도전을 따라갈 때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책의 저자 아툴 가완디(하버드 의과대 교수)는 요양원에 3대 역병이 돈다고 말한다. 무기력, 외로움, 무료함. 저 역병을 퍼뜨리는 병원균은 다름 아닌 서양의학이었다. 노인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환자로 여기는 관념. 서양의학은 늙어감에서 고립과 소외에 대한 공포를 찾아내려 하지 않는다. 약과 주사로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뉴욕 북부의 소도시 뉴 베를린에 자리 잡은 요양원 체이스 메모리얼. 1991년 어느 날, 응급실에 오래 근무했던 젊은 의사 빌 토머스가 부임한다. 그는 여느 의사와 달랐다. 아내와 다섯 아이들과 함께 근교에서 농사를 짓는 도시농부였다. 자신의 농장에서 가족과 함께 생명력 넘치는 삶을 영위하는 그에게 비친 요양원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노인들 옆에 생명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오래전부터 “좋은 삶이란 독립성을 극대화하는 삶”이라고 생각해온 토머스가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토머스는 요양원에 생명을 들여놓았다. 풀과 나무, 개와 고양이, 새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노인들 곁에 두기로 한 것이다. 예상대로 진입장벽이 높았다. 특히 의료진의 반대가 심했다. 개나 고양이를 한 마리씩만 허용한다는 뉴욕주 규정도 넘어서야 했다. 토머스는 문화가 갖고 있는 관성의 힘이 혁신의 싹을 잘라버린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하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점진적 방법도 거부했다. 한꺼번에 개 두 마리, 고양이 네 마리, 잉꼬 백 마리를 들여왔다. 충격요법이었다.

변화는 예상보다 빨랐다. 실어증에 걸린 노인들이 말문을 열기 시작했고 극도로 내성적인 데다 걷지도 못했던 노인이 개를 산책시키겠다고 나섰다. 노인들이 저마다 새장을 가져갔고 잉꼬에 이름까지 붙여줬다. 이어 토끼와 암탉은 물론 수백 개의 화분이 실내로 들어갔으며 잔디밭은 채소밭과 꽃밭으로 변했다. 그러자 복용하는 약이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사망률도 15% 감소했다. 가완디 교수는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저 (노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노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나라일 것이다. 고은의 시 ‘그 꽃’이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노인들이 생의 저녁나절에 자기 삶을 돌아보고 그것을 이야기로 재구성하게 하는 것, 그것이 내려갈 때 발견하는 꽃일 것이다.

우리의 요양원과 병원, 아니 도시 곳곳에 빌 토머스와 같은 ‘괴짜 의사’가 많아져야 한다. 노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꽃을 피우게 해야 한다. 노년이 꽃을 피운다면 그 꽃이 어찌 노인만을 위한 꽃이랴. 그 꽃은 가족과 친지를 넘어 인류 전체를 위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문재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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