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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영란법 시행 이후 곳곳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다. 학생이 교수에게 캔커피를 줘도 되는가, 공무원직의 여자친구에게 선물을 줘도 되는가 등등. 전북도의 신고센터만 해도 하루에 40~50건의 관련 문의가 쇄도한다고 하니, 과연 우리 일상과 삶의 풍속은 한동안 이 법을 놓고 시끄러울 듯하다. 기본적으로 나는 김영란법의 제정과 시행에 대해 찬성한다. 그만큼 우리나라에 부정청탁과 금품수수에 의한 부패와 불공정이 만연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시시콜콜한 시행규칙과 가이드라인에 대한 요구, ‘신경질’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어떤 비애를 느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규제와 절차에 대한 맹목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전면적 관료주의’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관료주의란 쉽게 말해, 그리고 부정적으로 규정하자면 그 어원인 ‘책상보(bureau)’에서 알 수 있듯 실제 삶과 유리된 ‘서류’들의 세계, 행정만능의 세계이다. 그것의 출발이 개인의 잘못된 판단, 부패를 불허하는 ‘공적 투명성’, ‘법치주의’를 겨냥했다고 해도, 현재 관료주의의 만연은 이미 긍정성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가령, 최근 나는 정부 지원의 어떤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집행 이전에 계획서, 지원서 등의 숱한 서류를 작성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을 뿐 아니라, ‘예산항목’에서 규정상 ‘이것은 되고 안되고’를 놓고 오랜 시간을 논의하고 고치고, 해당부서에 문의하고, 고치고 하는 등의 정말 ‘허튼 시간’을 보내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내가 들었던 통합보험이 실비보험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안(보험약관은 너무 어려울 뿐 아니라 설명도 복잡해서 여간해서는 다 기억해두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실비보험은 직접 신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몇 개월 전의 입원비를 신청하기 위해 보험사에 전화를 걸었다. 안내에 따라 진단서와 내역서를 발급받으려고 병원을 방문했다. 대기표를 뽑아 ‘이쪽’ 창구에 갔더니, ‘저쪽’ 창구로 가라고 해서 다시 대기표를 뽑고, 간신히 접촉된 그 직원의 지시에 따라 내과에 갔더니, 주치의가 진료를 보지 않는 날이기 때문에 다음날 오라고 한다. 또 피부과 진단은 또 별도의 신청과 절차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최종 필요서류를 얻는 데까지 일주일이 소요되었다.

몇 년 전, <개그콘서트>에 ‘비상대책위원회’라는 인기 코너가 있었다. 설정은 똑같다. 범인이 건물에 인질을 몰아넣고 10분 안에 요구한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폭탄을 터뜨리겠다는 상황을 놓고 경찰 고위간부들이 회의를 한다. 거기에서 책임자급 경찰이 하는 말을 요약하자면 ‘안돼’이다. “안돼, 10분 안에 그걸 어떻게 해? 일단 상부에 보고해야지. 청장님한테 가면, 청장님이 그래요. 그러면 인질을 대피시키는 것이 먼저야, 아니면 폭탄 제거반 투입이 먼저야? 네 생각은 어때? 인질을 대피시키는 것이 우선인 듯합니다. 안돼, 듣지도 않을 거면서 물어요. 폭탄 제거를 하려면 인력투입요청 서류를 만들고…” 등등.

너무 웃기는 코미디라고 생각했는데, 이 풍자가 실제로 ‘세월호’ 당시 우리가 겪은 실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컨대 ‘전면화된 관료제’의 사회란 ‘안돼’의 세계이다. 그것은 어떤 한 개인이 품은 의지와 행동력을 무수히 검문하고 차단시키는 수많은 ‘문’을 의미한다. 그 문들은 합리성, 공정성, 효율성으로 이루어진 ‘규제와 절차’를 의미하지만, 그 문을 열어젖히는 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물론, 사회정의와 공정성을 위해 법과 규정은 만들어져야 하고,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오류와 부정의 가능성을 잡아내어서 성문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 나는 그 해결책이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수한 규정이 필요 없는 ‘시민의식’의 형성. 그것은 대학을 기업화하고, 학생들에게 무수한 자격증 취득을 권하는 직업학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법으로, 잔소리로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할 수 있는 ‘어른’을 만드는 것이다. 어른이란 선택에 따른 권리와 함께 책임 있는 주체를 의미한다. 그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똑같이 ‘안돼’를 말하는 대신, ‘된다’고 해야 한다. ‘실용성과 경쟁력 있는 스펙, 효용성’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의 두려움을 잔뜩 짊어지우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해도 되고, 쓸데없어도 되고, 해봐도 된다고 자꾸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인간과 삶이 불행이 아니라 축복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삶과 타인,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은 우선적으로 그들을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류투성이일지라도 그들이 가진 창의력과 비판력이라는 ‘힘’을 회복하는 것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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