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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전을 하겠다며 주방에서 꼼지락꼼지락하던 딸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잎사귀 뒤에서 빵긋 달팽이를 만난 것이다. 곤충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는 아니었으나 말똥구리, 풍뎅이, 사마귀는 그리 낯설지 않은 내 어릴 적 소꿉친구들. 벌레만 보면 기함을 하는 아이를 타박하는 건 경우가 아니겠다. 자연과 접촉할 기회를 박탈한 채 아파트를 고향으로 만든 제 용렬한 아비를 탓하는 게 옳다. 아이는 달팽이의 성정을 이윽고 파악했는지 금방 친해진 눈치다. 어쩜 똥도 행위예술하듯 일획으로 시원스레 갈기느냐고 시시덕거린다. 가끔 접시 위에 얹어놓고 산책시키는 중이라며 잘 데리고 논다.

모두 배추로 연결이 되는구나. 소설 지나고 이곳저곳에서 김장 소식 들린다. 겉절이는 물론 막 담근 김치에 돼지고기 수육이 주르륵 배열된다. 입안이 복잡하도록 불룩하게 넣고 깨무는 그 맛에 은근하게 어울리는 말을 찾다가 이문구의 <문인기행>을 펼친다. 바싹 깨물어 먹고 싶은 문장들이 입안을 또 달군다. 그중에서도 “배추씨처럼 사알짝 흙에 덮여 살고 싶다”고 했던 박용래 시인께 바친 행장기의 한 대목이다. “그는 조상 적 이름의 풀꽃을 사랑하여 풀잎처럼 가벼운 옷을 입었고 그는 그보다 술을 더 사랑하여 해거름 녘의 두 줄기 눈물을 석 잔 술의 안주로 삼았다. 그는 그림을 사랑하여 밥상의 푸성귀를 그날치의 꿈이 그려진 수채화로 알았고, (…) 달팽이집이라도 머리만 디밀 수 있으면 뜨락에 풀포기를 길렀고, 저문 황톳길 오십 리에도 달빛에 별발이 어리면 뒷덜미에 내리던 이슬조차도 눈물겹도록 고마워하였다.”

초록에 흠뻑 물든 독후감으로 무장하고 잠깐 사무실 뒤편 심학산 다녀오는 길. 산길 지나 논둑길을 걸으니 시들어가는 풀잎과 풀포기에 발목까지 푹푹 빠진다. 어느덧 오늘도 저물어 세상에 어둠이 오고 집집마다 저녁 준비하는 소리 들린다.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새여나는 불빛이여 늦은 저녁床 치우는 달그락 소리여 비우고 씻는 그릇 소리여 어디선가 가랑잎 지는 소리여 밤이여 섧은 盞이여//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새여나오는 아슴한 불빛이여.” (박용래, 三冬 전문)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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