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아주 오래전에 들었다. 정말 길이 책 속에 있을까? 책과 함께, 책과 더불어, 책을 통해. 이 어려운 시기를 빠져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이 이 말속에 다 들어 있다. 해리 포터가 런던 킹스크로스 역의 9번과 10번 사이의 벽으로 난 길을 통해 호그와트로 들어가듯!

바깥 외출이 여의치 않아 산에 가지 못하고 옛날에 산에 갔던 기억이나 불러내어 되새김질하는 토요일 오후. 방구석에서 스킨답서스가 책으로 가득한 벽을 넌출넌출 기어오른다. 식물과 책, 책장과 유리창. 그중에서 줄기와 잎사귀를 쪽배처럼 타고 강원도의 산으로 빠져나가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곳은 삼척의 덕항산. 기암절벽으로 관광객을 끌어모은다는 중국의 이런저런 산들에 견주어 그 경치와 형세가 하나 꿇리지 않는 산이다. 환선동굴 입구를 지나 거의 수직에 가까운 경사를 치고 올랐다. 험준한 산이 기르는 식생은 다종다양할뿐더러 희귀한 종들도 많다.

드디어 능선에 올라 조금은 편안한 걸음을 옮길 때,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듯하다. 아껴가며 걷는 가운데 마침내 한 줄기를 잡아 내려오는 곳은 너무 수직 구간이라 철제계단에 의지해야 했다. 그렇게 거의 내려온 곳. 마지막인 듯한 쉼터에서 숨을 고르는데 첩첩산중을 배경으로 꼬부라져 돌아가는 전방의 길목에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출구가 보이지 않겠는가. 출출(出出). 그것은 어느 한 출구를 분명하게 표시하는 것이었다.

오지의 산 중에서 하루종일 뛰고 굴린 걸음들이 누적되었다가 낮밤이 교차하는 이 시간대에 일으키는 생각은 좀 특별한 법이다. 뒹구는 낙엽도 마르고 말라, 작고 작아진 뒤에 흔적도 없을 정도의 가벼운 연기가 되고서야 허공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出出. 세로로 적힌 저것은 저 지점이 이 산으로 들어왔던 자들이 또 그 어디 바깥으로 외출하는 출입문이 아닐까. 혹 킹스크로스 역의 9와 3/4 승강장에 해당하는 동양식 표지판이 아닐까. 멀리 환선동굴에서 내려오는 모노레일을 보면서 띵띵한 몸을 이끌고 그런 상상을 하면서 가까이 가 보았더니, 글쎄, 그것은 부산의 어느 등산동호회에서 달아둔 안내 리본이었다. 山, 山, 山!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