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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은 고민을 먹으며 자라는가 보다. 없는 살림에 왜 그렇게 빨리 무성해지는가. 어릴 적 동네 이발소는 제법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주인 혼자 하기에는 감당이 안 되어서 이발사, 면도하는 아가씨, 머리 감겨주는 청년이 따로 있었다. 각각 전문가가 담당하는 소규모 분업 체제를 갖춘 셈이었다.

들쭉날쭉하던 내 지식과 교양과는 달리 머리카락만 은밀한 속도로 수북하게 자랐다. 해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이발소를 다녀야 했다. 팔도 사투리를 진하게 구사하는 달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어느 연속극. 이발소에서 머리를 전문으로 감겨주는 청년이 맞선을 보고 와서 주인에게 말한다. 이제 결혼할 여자 앞에서 생색이라도 내어야 하지 않겠냐며 승진을 시켜달라고 조른다. 조금은 같잖게 눈을 흘기던 주인이 봉급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냉큼 이렇게 선심을 쓴다. 좋다, 내일부터 세발과장이야!

세월은 변함없이 흐르고 세상은 변한다. 머리카락 드문드문 흩어지니 생각에도 구멍이 숭숭 뚫리는가. 그 와중에 나도 이제 사는 기술이 좀 발달한 모양이다. 몸이 달라졌으니 쓰는 말도 깊어져야 한다. 물론 텔레비전도 흥미가 진진하지만 산에 가는 것도 재미가 만점이다. 기획되고 연출된 연속극이 굉장히 빨리 전개되는 것이라면 산을 무대로 벌어지는 것은 아주아주 느린 드라마.

산에 가면 사람보다 많은 게 풀이다. 흔들리는 노오란 무더기 앞. 와, 애기똥풀이 작년보다 곱네. 외친다면 조금 전문적인 냄새를 풍긴 셈이다. 꼬부랑 고개를 지키는 고려엉겅퀴에 나비 한 마리 앉았다 떠난다. 아, 청띠신선나비가 좀 야위었군. 한마디 던진다면, 이건 저 풍경과 제법 전문적으로 밀착하는 게 아닐까. 물론 이 세계를 그악하게 만드는 것도 이 세상을 말아먹는 것도 이른바 전문가들의 소행이다. 그러니 제 입맛에 맞춘 법의 밧줄로 세상을 몽땅 묶으려는 그따위 기술자들이야 논외로 치자. 오로지 두 번째 데이트 갈 때 어깨에 조금 힘을 주었을 그 세발과장님 같은 그런 전문가들처럼!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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