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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감명 깊은 책은 쉽게 말할 수 없지만 가장 영향력이 있는 책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무슨 고전 같은 것을 말하느냐고? 그건 아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책은 아마도 초·중·고 교과서일 것이다.

반박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교과서라니?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답할 분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을 꼽을 것이다. 불교 신자라면 불경을, 드물지만 이슬람교 신자라면 코란을 꼽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작가의 소설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마도 일시적인 감명일 수는 있지만 당신을 ‘만든’ 책은 아닐 터이다. 가장 엄청난 책은 당신 자체, 혹은 나아가 인간 자체를 만드는 책이다. 그 거룩한 책의 이름은 교과서다.

교과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발적으로 교과서를 읽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을 터이다. 하지만 교과서는 국가권력을 업고 있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개인에게 강제로 주입되는 것이다. 우리는 교육과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가 선(善)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 교육이 곧 사회적 성공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던 사회, 또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사회적 특권에 속했던 전근대 사회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한글을 깨치지 못한 할머니들이 한글을 깨친 뒤 내뱉는 감격을 전하며 배우는 것이야말로 ‘해방’과 ‘자유’임을 설파하기도 한다. 이것이 아마도 교육의 순수한 본래적 의의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국가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육에서 본래적 의의는 희박한 그림자로 남아 있을 뿐이다.

냉정히 말해 교육은 개인의 대뇌를 열고 교과서를 쑤셔 박는 행위이고, 학교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늘 은폐되어 있다. 생각해 보면, 교과서를 말로 되풀이하는 권위적 도구가 교사이며, 교과서를 확장한 것이 참고서이며, 교과서가 개인의 대뇌에 장착되어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 시험이다. 그 시험의 과정은 초·중·고 12년 동안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도 그 책의 내용을 알고 있느냐고 덤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교과서만이 알고 있는지 강제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수능시험은 결국 교과서에 근원을 둔 지식들이 머릿속에 어느 정도 들어 있는지를 총체적으로 점검하여 점수를 매기고, 그 점수로 개인의 서열을 정한다. 그 주홍색 서열이 이마에 한 번 찍히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카스트의 기호가 된다.

사람들은 왜 지금의 형태로 교과서가 세팅되어 있는지, 동일한 주제라면 다른 나라, 다른 사회의 교과서와는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곰곰 따져보면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것들이 모두 쓸모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교과서는 모든 인간에게 통용되는 진리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교과서와 지금 북한의 교과서, 대한민국의 교과서는 각각 다른 진리를 말하고 있다. 쿠바의 교과서와 미국의 교과서 역시 다를 것이다. 어느 교과서가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나는 한국인이기에 오직 한국의 교과서를 진리로 수용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을 칠 때마다 영점을 받았으니 그의 대뇌에는 교과서가 장착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국사 교과서를 배우는 12년 동안 한국사의 세세한 국면은 아마 잊을 수는 있어도 우리가 동일한 과거의 기억을 공유한 한민족이라는 명령적 진술은 이미 깊이 머릿속에 침투하였다. 쉽게 지울 수도 없고, 쉽게 비판할 수도 없다. 이것은 거의 모든 교과서가 동일한 구실을 한다. 초·중·고를 거치는 동안 우리는 교과서에 의식화되면서, 한국인으로 성장한다. 한국인과 중국인, 미국인, 북한인은 그렇게 해서 각각 만들어진다. 요컨대 그것은 인간을 보다 해방시키기 위해서,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실제 국가에 충성하는 개체를 만들기 위해서다. 교과서를 충실히 대뇌에 복제한 사람, 곧 우수한 인재들은 뒷날 다시 그 교과서를 개량하여 보다 강력한 교과서를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교과서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책이다. 감동이니 감명이니 하는 말과는 다른 차원에서 개인에게 깊이 각인되는 책인 것이다. 따라서 교과서를 엄밀히 분석해 보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교과서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 교과서만큼 빨리 사라지는 책도 없을 것이다. 학년을 올라가면, 학교를 졸업하면 그냥 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 장착되었으니 아무 소용도 없는 책이 교과서다. 학교를 마치고 나면 거들떠보지 않게 된다.

과거 사회를 알기 위해서도 교과서만큼 중요한 책은 없다. 구한말의 교과서는 많지 않으니 학자들이 수습해서 영인본으로 제작해 놓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교과서를 정리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교과서가 몇 종이었는지 또 얼마나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나아가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의 신민들을 만들기 위해 어떤 담론을 주입시키려 했는지 아직 충분히 연구되어 있지 않다. 해방 이후로 넘어오면 사정이 더욱 딱하다. 초·중·고 교과서는 수천 종에 이를 것인데 모두 남아 있는지 의문이다. 남아 있는 것만이라도 어디 한곳에 모으고 이미지 파일로 만들어 인터넷으로 제공했으면 한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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