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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안다. 누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에 관한 정보를 자연스레 모으게 되는데, 주로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를 먼저 따진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떤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면, 먼저 이렇게 묻는다. ‘어느 대학 나왔는데?’ 실제 학벌이 그 사람의 사회적 위상을 정하는 카스트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그것이 모두에게 깊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전근대 사회로 가면 약간 다르다. 사람을 만나 정보가 없다면, 먼저 그의 집안부터 알려고 든다. 그가 어떤 성씨이며 어떤 파에 속하는지, 또 그의 직계는 어떤 관직에 있었는지 등을 묻는다.

박지원이나 정약용처럼 유명한 사람이라면 소용이 없지만, 이름을 듣고 금방 감이 오지 않는 사람이라면 족보를 찾아서 계보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족보를 보고 그 인물의 직계나 방계를 훑어보면 그 집안의 위상이 대개 짐작된다. 보통 조선시대 작가 연구의 기초적인 작업이다. 그런데 약간 허망한 경우도 있다. 족보에서 일껏 내가 찾는 이름이 나와서 순간 기뻐했는데, 맞추어보니 동명이인이다. 이럴 때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김천택(金天澤)이란 인물이 있다. <청구영언(靑丘永言)>이란 시조집을 엮은 사람이다. 원래 시조는 노래로 부르는 것이다. 곧 노래가사다. 언제 생겼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 말 인물이 작가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대개 고려 말에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원래 노래인 데다 표기 수단이 없으니,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뿐이다. 그걸 1728년 김천택이란 사람이 모아서 <청구영언>이란 책, 곧 노래가사집을 엮었다. 이토록 중요한 가집을 엮었으니, 그 편집자 김천택에게 국문학자들의 관심이 쏠릴 것은 당연했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어떤 연구자가 족보를 뒤져 그 이름을 찾아냈다. 김천택이 광산김씨(光山金氏) 족보에 있었던 것이다. 김천택은 김춘택(金春澤)의 삼종제(三從弟)란다. 김춘택의 조부는 김만기(金萬基, 1633~1687)다. 김만기의 딸이 숙종의 첫 비(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다. 국구(國舅)인 것이다. 김만기의 동생이 곧 <서포만필>을 쓴 김만중이다. 김춘택의 작은할아버지인 것이다. 노론 중의 노론, 양반 중의 양반, 벌열 중의 벌열인 것이다. ‘광김(光金)’이라면 조선후기 벌열가의 대표인 것이다. 김천택이 이런 집안 사람이란다.

‘택’은 돌림자다. 김춘택이 있으면 ‘김천택’이 있음직하다. ‘천’이란 글자는 흔한 글자가 아니던가. 아무리 맞추어 보아도 김천택이 <청구영언>을 엮은 김천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김천택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수장(金壽長)은 <해동가요>란 가집을 엮었는데, 거기에 김천택을 ‘포교’라고 써 놓았다. ‘광김’ 김천택이 ‘포교’라? 이건 조선시대 문화에 대한 상식이 있으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김천택이 ‘광김’이라는 학설은 학계에서 이제 수용되지 않는다.

족보라는 것은 대개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족보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성행하기 시작했다.

대개 1423년에 간행된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영락보(永樂譜)>를 조선 최초의 족보로 본다. 유교적 가부장제에 입각한 친족제가 성립하자 남성 사족의 혈통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에 족보를 만들어 자신과 타자를 구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양반 사회에서는 타인을 만났을 때 그가 어떤 집안 어떤 사람의 자손인가를 아는 것이 퍽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렇게 남의 집 족보에 대해 아는 것을 ‘보학(譜學)’이라 했고 이것을 행세하는 양반의 교양으로 알았던 것이다.

족보는 양반들만 만든다고 했다. 상민이나 노비는 족보가 있을 리 없다. 양반 외에 족보가 있는 축으로는 중인이 있다. 중인은 조선시대의 기술직을 맡은 신분이다. 외국어 통역을 맡은 역관, 의술을 담당하는 의관, 그 외 중앙의 관청에서 재정과 관련된 여러 회계를 다루는(그러니까 이들은 수학자이기도 하다) 계사(計士), 관상감에 소속되어 천문학을 공부해 역법(曆法)과 책력(冊曆)의 제작을 담당하는 천문학관, 도화서에서 국가와 왕실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화원(畵員) 등이 중인에 속한다. 물론 관상감에는 풍수지리학을 전공하는 지리학관, 인간의 운명과 길흉화복을 점치는 명과학관(命課學官)도 있지만 중요시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눈에 뜨일 정도의 세력을 형성한 것도 아니어서 중인을 말할 때 거론되는 적이 거의 없다. 이들 중 역관과 의관이 중인의 70~80%를 차지하므로 보통 의역중인(醫譯中人)이라 부른다. 또 의관과 역관, 천문학관은 비록 잡과(雜科)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어쨌건 과거를 통해 뽑는다. 계사와 화원은 취재라는 약식 시험으로 선발한다.

중인들은 의외로 추적하기 쉽다. 서울에만 있었던 신분이고 또 자기들끼리 결혼하는 폐쇄적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역과 시험을 치른 뒤에는 합격자의 명단을 기록한 <역과방목(譯科榜目)>을 낸다. 의관은 <의과방목(醫科榜目)>, 음양과는 <운과방목(雲科榜目)>, 계사는 <주학입격안(籌學入格案)>을 낸다. 이것을 보면 누가 어느 해에 어떤 잡과에 합격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에 합격자의 인적 사항, 곧 이름, 사조(四祖), 관향(貫鄕) 등을 기록해 놓는 것이다. 이들은 족보를 따로 만든다. <의역주팔세보(醫譯籌八世譜)>란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의원과 역관, 계사만 모아서 만든 족보이다. 서로 통혼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엮어서 한꺼번에 족보를 만든 것이다. 이 족보를 보면 중인들은 쉽게 추적할 수가 있다.

중인 족보로는 <성원록(姓源錄)>이라는 책이 있는데, 고맙게도 모 출판사에서 영인본을 냈다. 구입해서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부지런히 보았다. 비전공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나는 이 책에서 꽤나 귀중한 정보를 얻곤 했다. 예컨대 신윤복은 그때까지 그 가계가 알려지지 않았는데, <성원록>을 보고 그가 저 유명한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申末舟)의 후손인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계통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아마도 서파일 가능성이 있었다. 어쨌거나 조선의 치밀한 족보 문화가 연구자에게 큰 편리를 제공하는 셈이니, 후손으로서 한편 고마운 마음이 든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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