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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 입학 때, 그리고 직장에 들어갈 때 입학·입사 서류를 만들면 거기에는 반드시 취미란이 있었다. 적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공연히 적지 않으면 뭔가 불이익을 받을 것 같아 꼬박꼬박 채워 넣었다. 요즘도 그런 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서류를 만들어야 했던 때는 주로 70, 80년대라 먹고살기 바쁜 가난한 시절이었다. 무슨 취미를 기를 여유가 있단 말인가. 또 대학생 때는 ‘음주’ ‘흡연’이 취미였지만, 그것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제일 만만한 것이 ‘독서’였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지만, 이제는 담뱃값이 올라 흡연의 즐거움도 쉽게 누릴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 어쨌거나 왜 남의 취미는 묻는단 말인가. 나는 취미란의 취미들이 어떤 효용가치가 있는지 지금도 모른다.

취미가 독서라면 이런 질문도 반드시 받았을 터이다. 가장 감명 깊었던 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도 상당히 곤란하다. 나는 책 읽기와 관련하여 지금도 ‘감명’이란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국어사전은 ‘감격하여 마음에 깊이 새김. 또는 새겨진 그 느낌’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정말 사람마다 그런 감격해 마지않아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그런 책이 있을 것인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마도 대부분 없으리라 생각된다.

질문은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얼마 전에는 강연을 마친 뒤 “감동을 받은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언제나 답할 말이 애매하다. 애써 머릿속을 뒤적여보지만 그런 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감동 받은 책이 없다니, 무언가 게으른 사람 같기도 하고, 성의 없는 책 읽기로 이제까지 살아온 것 같아서 약간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감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온몸이 전율할 정도로 감동을 받은 적이, 그리하여 내 생에 큰 영향을 끼친 그런 감동이 있었는가 말이다. 그건 아마도 그런 질문을 받는 순간 머리에 그냥 떠오르는 그런 것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그런 감동적인 순간은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도대체 왜 이런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가? ‘당신이 감명 깊었던 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내게만 던져진 것도 아니고, 요즘 새로 생긴 것도 아니다. 이 질문은 나의 어떤 정치적 성향을 알아내려는 불순한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찌 보면 우리는 책을 읽으면 무언가 감동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식으로 변명하자니 마음이 한결 수월해진다.



사실 그렇게 뜨거운 감동을 받은 책은 없지만, 내게 약간의 영향을 끼쳐 기억하는 책은 있다. 물론 그것이 내 인생의 행로를 바꾸었다든지 하는 그런 책은 아니다. 또 이름만 대면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런 묵직한 고전도 아니다. 먼저 떠오르는 책은 중학교 3학년 때 본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이다. 소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프랭클린이 17세에 가출하여 인쇄소 직공이 되어 거기서 책을 읽으며 스스로 지식을 쌓아나가고, 24세에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의 경영자가 되는 등의 과정은 중학교 꼬맹이에게는 찬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더 충격을 받았던 것은, 프랭클린의 엄격한 자기 관리였다. 자신의 도덕적 결함, 고쳐야 할 약점의 목록을 만들고 하루하루 반성하여 지키지 못한 경우 동그라미로 표시를 해 그 동그라미가 없어지도록 노력하는 프랭클린의 노력이 내게 희한한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사회와 학교, 나라가 내게 박아 넣은 이상한 도덕률에 대한 반성적 사고가 전혀 없는 상태였으니, 프랭클린의 계획이야말로 나를 온전한 인간으로 이끄는 지침이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잠시 나는 그것을 흉내 내었다. 하지만 물어보나마나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상하게도 비슷한 일은 반복되었다. 프랭클린에 대한 연모가 끝난 뒤 다시 유사한 책에 매료되었다.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의 <준주성범(遵主聖範)>이 그것이었다. 프랭클린은 엄격한 청교도 쪽이었지만, 켐피스 쪽은 경건하기 짝이 없는 가톨릭 신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준주성범>이 내 마음을 끌었다. 손바닥만 한 책을 한 동안 가지고 다니며 흉내를 내보려 했지만, 그 결과는 프랭클린의 <자서전>과 다르지 않았다. 이 책으로 얻은 소득이 있다면, 내가 ‘경건’과는 아주 길이 다른 속된 삶을 사는 인간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소득은 절제하는 경건한 삶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뒤에 공부하는 길로 접어들면서 자기 욕망을 절제하는 삶의 길이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종교가 동일하게 지향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교와 성리학 역시 인간의 욕망에 대한 깊은 성찰, 욕망의 절제 없이는 결코 만족스러운 삶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적 종교일 뿐이고 제도화된 종교, 곧 교단을 형성한 제도적 종교는 그런 절제와 아무 관련이 없거나, 절제를 팔아서 돈과 권력을 향유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이후로 종교 서적에서 무언가 느낌을 얻은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감명 받은 책을 떠올릴 수 없게 된 것은 별로 아름다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끝으로 한마디 덧붙인다. 프랭클린의 <자서전>은 서문당의 문고본으로 읽었다. 1970년대 서문당의 문고본은 꽤나 좋았다. 값도 저렴하여 고등학생 신분으로도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서가 맨 아래쪽 한쪽에는 그때 책 몇 권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남아 있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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