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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갑사는 천년 고찰이다. 대웅전에서 한 끗 비켜난 곳에 마음을 움푹 퍼가는 진경이 있다. 대적전 앞 배롱나무가 좋아 그늘로 가니 할머니 한 분이 승탑 곁에 보물처럼 쉬고 계신다. 슬그머니 돌무덤에 앉았다. 배롱이 참 훤칠합니다, 혼자 오셨나요. 요 아래 공주에 사는데 버스 타고 혼자 종종 나와요. 집에 있으려니 자꾸 등 아래가 푹 파이고 땅이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아서요. 할머니는 시원스레 말을 잘 이어나간다. 저 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꽃 피고 곧 열매 맺더니 금방 서리 내리고, 뭐 한 해가 가요. 한바탕 웃음을 남기고 할머니 떠나고 나만 남았다. 할머니의 등 아래가 된 기분으로 배롱나무 아래 “寶物 第二五七號, 甲寺 浮屠” 표지석을 한참 본다. 이 무거운 돌에 왜 ‘뜰 浮’인가.

돌계단을 내려오니 기름지고 구수한 풍경 속에 색다른 간판이 눈길을 끈다. 적혀 있기를, “지렁이는 흙 사이를 돌아다니며 공기의 순환을 원활하게 해주고 (…). 지렁이의 먹이는 흙이에요. 지렁이가 싸는 똥도 흙이구요. 흙을 먹으며 미생물을 섭취한 후 배설하기 때문에 지렁이가 있는 곳의 흙은 양분이 많고 비옥하답니다. 발밑을 보세요! 동글동글한 흙이 바로 지렁이가 만든 흙이랍니다.”

우리는 흙을 바로 먹을 수는 없고 흙이 기른 곡식을 삶아서 먹으며 산다. 누구나 다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니, 나중 지렁이를 안 만날 수도 없겠다. 지금도 발밑에 있을 지렁이와 함께 당장 떠오르는 건, <순자>의 권학편에 나온다는 내용이다.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 강한 근육과 뼈도 없는 지렁이가 한결같은 의지로 흙속을 돌아다니는 모습에서 성실하게 공부하는 자세를 본 것이다.

간판의 그림을 보니 지렁이는 입, 심장, 항문, 생식기는 물론 뇌를 구비했다. 안타깝게도 눈이 없다. 흙에 물이 차면 숨을 쉴 수가 없기에 바깥으로 나온다고 한다. 비온 뒤 가끔 행위예술하듯 꾸물꾸물 기어가는 지렁이. 아니오, 그게 아니오. ‘아니 不’자를 끊임없이 쓰면서 나아가는 지렁이였구나. 또 하나를 배우며 계룡산 갑사를 떴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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