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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다. 따뜻하다. 눈부시다. 봄이 오면 가장 크게 변하는 건 햇빛이다. 햇빛은 부피를 가지지 않는다. 제가 만나는 그것을 모두 그것으로 만들어준다. 산에 들어가서 숲, 강에 뛰어들어 강물, 바위를 만나면 고대의 침묵을 빚어낸다. 물오른 물참대 가지처럼 빳빳하게 내리꽂힌 햇살 사이로 걸어간다. 낙엽은 제 본래의 모양과 색을 모두 버렸다. 세상에게 받은 것은 고스란히 세상한테 돌려준 뒤 지하로 녹아드는 잎들의 최후.

경북 경주와 포항의 한 경계인 운제산 산여계곡. 운제(雲梯)는 구름의 사다리이다. 원효, 의상, 자장, 혜공. 숱한 고승들이 산과 계곡을 오르내리며 수행할 때 구름을 사다리 삼았다는 뜻을 살린 이름이다. 혼자 특출하게 높은 산은 없고 모두들 다정하게 어깨동무한 형제들처럼 봉우리와 능선이 죽 이어진다. 신라의 배후가 되는 이 산이 내어준 길을 걸을 때 무언가 신령한 기운에 휩싸이는 건 이런 풍수와 지리의 덕분일 것이다. 인걸은 가고 없지만 이름은 아직도 남아서 풍광을 휩싸고 돈다. 바람을 타고 눈빛 형형한 도사가 뛰어나올 것 같은 저 신통한 골짜기.

이런 날, 흥건한 봄빛에 마취되어 방자한 생각 하나가 흘러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얼치기 도사 흉내라도 내본다면 오늘 여기가 딱 좋을 것 같다. 도(道)란 무엇일까. 벽돌로 이루어진 몸, 그게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으나, 벽돌 한 장, 딱 끼우면 완성되는 그것이 있어, 그 벽돌 하나 찾으러 세상 돌아다니는 중인가, 이제 그 한 장을 찾는다면 끼워넣어야 할 곳이 여기일까, 목덜미를 더듬는 순간, 좁은 골짜기에서 왁자하게 몰려나오는 건 낙엽이었다. 길바닥의 저 낙엽은 그냥 떼굴떼굴 구르는 죽은 잎이 아니다. 얼굴을 덮고도 남을 만큼의 크기로 정확하게 나를 겨냥하여 오는 것 같다. 게 섰거라, 시방 어디에서 뭘 찾아 헤매느냐! 주장자 들고 쫓아오시는 큰스님들.

마침 길옆에 집 한 채가 있다. ‘동동주/파전/닭백숙’이나 파는 여염집인 줄로 알았는데 어엿한 사찰이다. <정토사/淨土寺>. 햇빛 속의 입간판 속으로 오늘은 얼른 몸을 피하지만!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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