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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영화감독은 1993년에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조연출로 데뷔해서 1997년에 첫 감독 작품으로 <초록물고기>를 내놓았다. 그후 <박하사탕>(1999), <오아시스>(2002), <밀양>(2007), <시>(2010)에 이어 이번에 8년 만에 신작 <버닝>을 선보였다. 데뷔 후 25년 동안 6개의 작품을 만든 셈인데, 작품 수가 적은 편에 속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40대 초반에 데뷔해서 그나마 50대에 작품활동을 왕성히 한 셈이고, 60대에 접어들어서는 중반에 이르러 신작을 선보인 게 됐다. 그의 이력을 보면 영화계 데뷔 전 1992년에 한국일보 문학상(소설)을 수상한 게 눈에 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나는 <밀양><시>에 이어 이번 작품 <버닝>을 몇몇 친구와 함께 극장에 가서 봤다. 그의 영화에는 전통시장의 뒷골목, 작은 읍내 미장원, 허름한 호프집 등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의 적나라한 일상의 장면들이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담긴다. 그 장면들 속의 배우들도 평상 생활의 화법, 행동방식, 일상적 습관들을 그대로 리얼하게 연기한다. 특히 이번 영화 <버닝>에는 법정 장면이 나오는데 판사가 어찌나 말투까지 현실적으로 연기하는지 영화를 보고 나온 친구가 진짜 판사인 줄 알았다는 말을 했다. 지난 작품들에 비해 <버닝>은 한국 사회 부의 상징인 서울 강남이 등장한다는 것이 새롭다.

주인공 청년 종수(유아인)의 아버지는 강남에 부동산을 사서 부를 축적할 기회를 놓친, 파주에서 소를 키우는 사람인데, 공무원을 폭행해서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다. 종수와 대척지점의 청년 벤(스티븐 연)이 강남에 살면서 외제차를 몰며 초호화생활을 하는 사람인지라 이 영화에서는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의 생활공간과 벤의 강남 공간이 번갈아가며 어우러져 등장한다. 여주인공 해미(전종서)는 종수의 어릴 적 동네 친구인데, 그 중간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서울 남산자락 후암동 고지대 원룸에서 산다. 해미의 방 창문으로 남산타워가 보이고, 여주인공이 여행을 가거나, 나중에 실종된 후에도 종수는 그 방에서 창밖으로 남산타워를 바라본다. 함께 영화를 본 Q는 남산타워와 해미 원룸방의 대비를 눈여겨보고 감상을 얘기하기도 했다.

배우 유아인이 출연한 영화 '버닝'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세 청년의 이야기를 줄거리로 한다. 감독은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 부모 세대보다 더 못살고 힘든 최초의 세대다. 지금까지 세상은 계속 발전해왔지만 더 이상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없다. 요즘 세대가 품고 있는 무력감과 분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한다. 주인공 종수는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작가가 되는 게 꿈이지만 택배 알바로 힘들게 살면서 재판받는 아버지 뒷바라지하느라 쫓아다닌다. 눈은 조금 풀어져 있고 무표정하게 고개를 갸웃하고 무기력감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나온다. Q는 종수가 계속 (불안한 듯) 몸을 흔들더라고 예리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P는 종수에게 감정이입이 된다고 했다. 이 영화를 본 다음날 아침에 나 역시 이 세 명의 청년들을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무엇보다도 세 청년 모두 무기력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주인공 해미는 어렵게 살면서도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와서 부시맨들의 문화 속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뜻있는 배고픔)를 얘기하며 그들의 춤을 추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서 결국 ‘실종’되는 걸로 처리된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우리 삶 속에 의미를 찾는 갈망의 결핍과 좌절을 표현하는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벤도 젊은 나이에 어찌 그런 호화생활이 가능한가 의아함을 불러일으키고 해미의 실종과 연관된 다소 사이코패스적 인물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계속 불러일으키지만, 마지막에 가서 그가 보여준 너무 슬픈 눈빛 연기가 잊히질 않는다. 돌이켜보면 한 세대 전에는 힘들었어도 공장에서 일하며 현실과 싸우는 노동자, 정치상황에 항거하는 운동가라는 의지와 열정의 건강한 청년상이 있지 않았던가.

이 영화는 철저한 사실주의 영화이면서도 장면 하나하나가 매우 철저하게 기획되고 공들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실감이 전달될 정도로 깊이가 묻어난다. 배우들의 연기와 미스터리한 스토리, 현실적 장면들과 그 안에 묵직하게 담겨 있는 의미망들, 섬세한 상징들, 긴장감을 더하는 음악, 새벽빛과 노을의 아름다운 풍경 등 영화의 모든 것이 하나로 조화롭게 무르익어 잘 녹아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러닝타임이 두 시간이 넘지만, 장면 장면이 속도감 있게 전환하면서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영화를 보고나서는 이창동 감독이 지금의 한국을 대표하는 정신적 삶의 전형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고, 또 그가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구나 하는 평가를 하게 됐다.

주인공 종수는 어릴 적 어머니가 가출했고 아버지가 어머니 옷을 모두 불태우게 해서 그 불타는 장면을 트라우마로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종수를 통해 드러나는 ‘버닝’은 단순히 소멸시키는 행위이거나, 잔혹한 파국에 불과하거나, 종수 내면에 갇혀 있던 복잡한 좌절과 분노, 고조되는 강박을 표출하는 것만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프랑스 신학자 테야르 드 샤르댕의 말에 의하면, ‘버닝’-불은 ‘존재가 발원한 샘’이며, 태초에 불이 있었다. 우주 시작의 빅뱅은 최초의 불꽃으로 묘사된다. 그러기에 ‘버닝’은 한 젊은 청년이 삶에 주어진 트라우마와 모든 대내외적 장애를 활짝 벗어던지고 존재의 근원적 샘으로 솟아오르는 적극적 행위이기도 하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어떠한 인간의 현실에서도 인간은 존재의 근원을 꿈꾸며 현실의 몰락을 정신적 상승으로 전환하며 비약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금실 | 법무법인 원 변호사·포럼 지구와사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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