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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뜨겁다. 국민적 관심사가 주류지만 개인적 감정이나 분노 표출도 있는 모양이다. 지난 8개월간의 국민청원을 정리해 보니 가장 많이 등장한 키워드는 대통령, 아기, 여성, 처벌, 정책, 학생 순이고, 국민의견이 수렴된 분야의 순서는 인권·성평등, 보건복지, 안전·환경이라고 한다. 이를 결합해보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국가의 특별한 배려를 호소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그때의 사회적 이슈에 대한 반응이 많았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사회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으로도 읽힌다.

헌법 제34조에 규정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 열거된 특정 계층과도 거의 일치한다. 헌법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천명하면서 국가의 사회보장·사회복지 증진 의무, 여자의 복지와 권익 향상,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향상 정책실시 의무,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 등을 규정하고 있다. 우리 헌법이 ‘사회국가’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제10조), 평등권(제11조) 등과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및 사회적 기본권 등을 합해보면 사회국가와 복지국가의 이념이 헌법에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사회국가를 ‘사회주의국가’와 혼동하거나 ‘사회’라는 단어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은 달리 해석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가 사회적 안전과 사회적 정의를 지향하는 국가임은 부인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도 인정한 바 있다. ‘사회’라는 단어를 좌파나 빨갱이로 인식하면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노동권, 주거권, 경제민주화 등 사회복지와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기본권 강화를 특징으로 하는 대통령 개헌안을 좌편향 사회주의 개헌안으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사회국가란 사회적 안전과 사회적 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국가다. 복지국가와 혼용해 쓰기도 한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로 인해 야기된 폐해를 시정하여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경제적·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체제를 말한다. 산업화로 왜곡된 사회경제구조 속에서 희생되거나 불이익을 받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사회적 정의가 실현된다. 공동체 내에서 상대적으로 지위가 약하거나 경제적으로 빈곤한 이들이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유지해야 실질적 평등이 실현될 수 있다. 양극화와 소득불평등이 어느 정도 해소되어야 계층 간 불화와 적대감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줄어들고 공동체의 평화가 유지되어 사회적 공존이 가능해진다. 의료체계, 최저 생활 보장, 질병·고령화·사고·실업에 대한 공적 보험 등과 같은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는 것이 사회국가의 주요 과제다. 국가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공동체 구성원도 사회적 연대성과 기독교적 형제애를 발휘해야 한다.

국민청원에 등장하는 여성, 학생 또는 청소년, 아기 등은 사회적 약자다. 여기에는 노인, 장애인이나 외국인 노동자, 북한이탈주민 등도 포함된다. 물론 이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안의 구성원이거나 본인의 경제적 형편이 좋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 모두가 사회적 약자는 아니다. 경제적 사정과 무관하게 질병이나 고령 등으로 인하여 사회적 지원과 보호가 필요한 계층도 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과 보호를 내용으로 하는 법률과 제도가 구비되어 있고 사회정책도 시행되고 있지만 사회적·경제적 양극화는 여전히 심각한 사회문제다. 사회적 안전과 사회적 정의를 지향하는 사회국가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고, 누구나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정의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사회주의국가의 계획경제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사회국가 내지 복지국가 원리가 경제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분배보다는 성장을 우선시하는 보수층에 깔려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국가의 목표는 민주적 및 법치국가적 기본 원리 속에서 추구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국가와 다르다. 법치국가 안에서의 사회적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경제성장은 자유시장에 맡긴다고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사회·문화·교육 등 모든 정책을 통하여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형성하기 위하여 사회현상에 국가가 관여하고 간섭하고 분배하고 조정하는 임무를 잘 수행해야 한다”고 헌법재판소도 결정한 바 있다. 사회적 불평등 해소를 위하여 사회국가원리와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를 수용하고 있는 헌법 정신을 다시 새겨야 한다. 헌법은 사람답게 사는 세상,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지향하고 있다.

<하태훈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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