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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시절 좋은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교수 아닌 학생이 그 연구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된 것은 모교 최초라는 연락도 받았다. 이른 아침이었다.

소식을 들은 지도교수님은 오전 일정을 미루고 곧장 학교로 오셨다. 지금 태연하게 공부가 되겠냐며 교내 커피가게로 향하시더니, 주문하다 말고 주인아주머니께 “얘가 제 제자인데 이번에 하버드 가요. 좋은 장학금 받고.” 자랑을 하셨다. 아주머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핏 보면 선생님은 얼음 같은 이미지였으니까. 그러다 뒤늦게 “아유 교수님, 얼마나 자랑스러우시겠어요!” 덧붙였다. 민망해하며 엉거주춤 있던 나는 원두를 갈던 알바생과 시선이 마주쳤다. 안경 너머로 빙글 웃는 그녀 눈길엔 ‘저런 팔불출 선생님이 다 있나요’ 쓰여 있었다. 덩달아 쿡 웃다 다음 순간 뭉클했다. 살면서 누군가 나를 위해 팔불출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대학 합격했을 때 부모님조차 그러시지 않았다.

그로부터 여러 해 지나서였다. 단짝친구가 유학에서 돌아와 유수 대학에 임용되었다. 교수가 된 것이다. 세부전공은 달랐어도 서로의 지도교수님을 알던 터라 친구는 인사드리러 찾아뵈었다고 했다. 참 잘되었다고 기뻐하시며 선생님이 말미에 이렇게 덧붙이셨단다. “근데 우리 소영이도 그 전공 자리가 워낙 안 나서 그렇지, 곧 교수 될 거야”라고. “으아, 음성자동지원 된다”며 친구 앞에서 킥킥 웃었다. 그리고 그날 밤, 자다가 깨어나 울었다.

오래전 ‘내 제자 하버드’ 하신 그날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이제 주위에서 축하인사 건넬 텐데 유심히 관찰해보라고, “근데 난 언제쯤” 혹은 “근데 우리 애도 곧” 식으로 말미에 한마디씩 얹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상대를 축하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저렇게 덧붙이는 건 산뜻하지 못하다고, 그런 못난 사람이 또 없다 하셨다. 나로 인해 선생님이 부지불식간에 산뜻하지 못한 부류가 되셨구나 싶어 마음 아팠다. 당시 난 비정규직으로도 좋은 선배 연구자들과 즐겁게 공부하던 중이었지만, 그날 하루는 선생님이 다시금 팔불출 되실 현실여건이 주어지길 간절히 바랐다.

‘홀레 아주머니’(Frau Holle)라는 독일 옛이야기에는 우물가에서 날마다 손가락에 피가 날 정도로 베를 짜는 소녀가 등장한다. 핏물 든 실타래를 씻다 물에 빠뜨린 소녀는 의붓어머니 질책에 못 이겨 그것을 찾으려 우물로 뛰어든다. 그 아래에서 그녀는 친어머니 손길을 지닌 홀레 아주머니를 만나 살뜰한 보살핌과 가르침을 얻는다. 내겐 대학원 진학이, 말하자면 그 우물이었다. 소녀가 우물 아래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예상 못한 채 현실이 고통스러워 무작정 뛰어들었듯 나 역시 그랬다. 고시공부만큼은 싫었고, 자정까지 입시학원 알바를 하지 않아도 조교일 하며 학비 벌 수 있다기에 발을 떼었다. 시작은 그랬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홀레 아주머니들께 닿았던 것이다. 모교 울타리 안과 밖, 전공 내부와 외부, 학생시절과 이후를 넘나들며 보살핌과 가르침을 받았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많이 받았다.

아주머니 품을 떠나 다시 세상으로 나온 소녀가 먼저 들른 곳은 아무도 반기지 않을 의붓어머니 집이었다. 좋은 대체부모를 통해 채워지고 성장한 아이는 이렇듯 상처의 근원을 찾아 묵은 실타래를 풀고 한 발 더 내디딘다고, 옛이야기를 연구해온 분이 알려주셨다. 수많은 메르헨이 이 서사구조를 갖는다고 말이다. 이른 시각 깨어, 풀어야 할 실타래에 관해 생각해본다. 그러자 여기 미처 못 적은 고마움들이 기억 저편에서 아침 해처럼 솟아난다.

가정의달을 맞아 “스승의 은혜는 어버이시라” 노랫말을 되뇌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경우 부모마음, 혹은 자녀가 갖는 애틋함이 일반적으로 어떠한가를 스승들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유추하여 헤아려볼 수 있었다. 처음부터 갖지 못했던 원형이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내면에 만들어진 셈이다. 찾아갈 가정이나 애착할 가족 없는, 그래서 이웃이 무심코 던진 “성장배경이 중요해” 같은 말에 마음 다쳐본 다른 누군가도 기억의 방에서 자신만의 홀레 아주머니를 찾아내기를, 그(그녀) 역시 고마움을 품고 한 발 더 내딛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소영 |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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