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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는 미래가 얼마 남아있지 않기에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과거를 돌아보며 삶의 맥락을 이해하게 된다. 삶의 맥락 속에는 다양한 소질과 성과, 성취와 상실, 기쁨과 고난 등이 서로를 규정하며 얽혀있고,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인간의 삶’이라고 부르는 놀라운 구조물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노년에 이르러 삶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이러한 인식을 통해 후대에게 배울 만한 지혜를 전달하게 된다. 노년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노년의 과정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고 실현하는 데 있다. 복잡하게 얽혀 형성된 전체 구조물로서의 ‘인간의 삶’을 통찰하는 인격을 지닌 사람은 사는 데 급급해 격류에 쓸려다니는 이들에게 삶의 전모와 본질적 의미를 깨우쳐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조절하게끔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노년의 가치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롤 모델로서 나는 종종 프란치스코 교황을 떠올린다. 그는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청년기에 예수회 사제가 됐다. 노년기에 교황이 됐을 때, 역대 어떤 교황도 사용한 적 없는 ‘프란치스코’를 이름으로 선택했는데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따온 것이다. 교황으로 취임한 지 만 2년이 되는 해인 2015년 6월에는 로만 가톨릭 역사상 최초의 생태회칙인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발표했는데 이 회칙의 제목은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에서 따온 것이다. 회칙은 교서, 담화 등 다양한 교황문헌 중 가장 비중이 높은 형식이다. 이 생태회칙은 그해 11월에 열린 파리 기후변화회의에서 기후협약이 성사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성 프란치스코의 ‘태앙의 찬가’는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로 찬미받으소서. 저희를 돌보며 지켜주는 대지는 온갖 과일과 색색의 꽃과 풀들을 자라나게 하나이다”라고 노래한다. 교황은 이 노래를 인용하는 걸로 회칙을 시작하고 이 누이인 대지가 지금 울부짖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무책임한 이용과 남용으로 지구의 재화들이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회칙 1,2항). 회칙은 우리의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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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받으소서’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리스도교인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대화를 건네는 방식이라는 것과 환경, 경제, 사회의 통합생태론(Integral Ecology)을 제시한 데 있다. 모든 것이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오늘날의 문제들이 세계적 위기의 모든 측면을 고려하는 시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회칙 137항). 통합생태론은 빈곤 문제와 환경 문제를 통합하는 접근법이다. 여기엔 교황이 겪은 생생한 삶의 경험들이 녹아있다. 교황은 아르헨티나에서 빈민사목을 담당했었다. “소외된 이들은 수십억명에 이르러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하고(회칙 49항), “환경과 사회의 훼손은 이 세상의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일상생활의 체험과 과학연구는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모든 환경 훼손의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회칙 48항).
교황이 롤 모델로 삼은 성 프란치스코는 새들과 대화를 나누고 늑대도 설득시켰으며, 십자군전쟁 당시에는 홀로 전장에 뛰어들어 적장인 술탄을 면담한 일화가 남아있다. 800년 전 중세 속의 이 성인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통해서 생태적 삶의 징표로 다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름과 생태회칙을 통해 노년의 지혜를 드러냈다고 생각된다. 그의 지혜가 지금 시기 전 인류가 처한 위기를 깊이 짚어내는 것이라는 사실은 그의 삶이 각 시기의 독자적 형상과 위기를 녹록지 않게 겪어내며 무르익혀온 것이라는 확인을 하게 한다. 노년의 가치는 지혜로 드러나는데, 지혜는 인격이라는 그릇에 자신의 삶의 궤적과 경험을 생생히 담아 우려낼 때 형성될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찬미받으소서’에는 여러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언급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로마노 과르디니의 <근대의 종말>은 가장 많이 8번이나 언급된다. 특히 생태위기의 근원으로서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의 세계화(The globalization of the technocratic paradigm)’를 지적하는 대목에서다. 과르디니는 <근대의 종말>에서 자연, 인간의 주체성, 문화에 대한 근대적 세계관이 몰락했다고 본다. 인간의 주변세계로서 자연은 다가갈 수 있고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직접적인 관계가 불가능한 존재로 ‘자연스럽지 못한 자연’이 됐다. 주체성은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개인의 고유한 삶에 대한 느낌과 삶의 영역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점점 더 많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회업무 수행과정에서도 영혼이 없는 사물처럼 취급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어 ‘인간답지 못한 인간’이 되어간다. 인간의 작업은 전체적 삶을 체험할 수 없게 됐다. 과르디니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인간의 손을 벗어났고, 그래서 거침없이 마구 부려질 것이며, 힘의 정도도 정확히 측정해낼 수 없는 이런 과정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국가이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본다.
생태위기는 근본적으로 삶의 실감이 사라져가는 위기이다. 그걸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이 마력 같은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에 실려간다는 점에서 존재의 위기이다. 이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다시 교황의 지혜, ‘찬미받으소서’로 돌아가 답을 찾고자 한다.
<강금실 | 법무법인 원 변호사·포럼 지구와사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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